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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Mar 06. 2021

여자라서...

<이갈리아의 딸들>이 첫 번째로 읽어야 하는 책이네


대학 새내기 딸이 수강 신청한 <페미니즘> 강의계획표를 확인하며 이야기를 잇는다. 이 책은 작년에 내가 먼저 읽었는데 마침 딸도 읽으려던 참이라 이어 읽었던 책이다. 당연하고 익숙하게 받아들여온 권력구조와 성불평등한 상황을 역전하는 작가의 기발한 발상에 느낌표를 연발하며 읽었던 작품이었다.


아이들에게 <이갈리아의 딸들>을 소개해주자 막내딸이 내게 <노멀 모드>란 웹툰을 알려줬더랬다. 얼마나 유명한 웹툰인지 아들도 이미 정주행을 마친 작품이었다. 남녀의 역할이 완전히 바뀌어 여자가 군대 가고 남자가 출산하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에피소드를 담은 작품이었다.


아들이 레진코믹스에서 구매해둔 <노멀 모드>를 읽어보니, <이갈리아의 딸들>과 세부 디테일에서 있어서는 꽤나 차이가 있었지만 비주얼적 요소가 가미된 덕분에 더 생동감을 느끼며 즐길 수 있었다. 내가 그동안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을 아이들은 웹툰을 보고 배우고 있었던 게다.

  



넷플릭스에서 즐겨봤던 작품 중 남녀에 대한 고정관념이 뒤바뀐 세상을 다룬 <거꾸로 가는 남자>란 프랑스 영화가 있다. 한참 불어에 관심 갖던 시기인 데다 성평등이란 주제는 내 삶을 관통하는 핵심 어젠다이기도 하기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이 <불평등>하다고 여겼던 것은 내 나이 세 살 남짓. 남동생이 태어난 직후였다.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이 남동생에게 쏟아지는 걸 경험한 후 엄마에게 시장에서 고추 사서 내게도 달아달라고 떼를 썼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공부 곧잘 하는 내게 "네가 아들이었이면..." 라며 말끝을 흐리곤 하셨다. "너는 딸이니 재산은 모두 동생 거다. 시집가기 전까지는 뒷바라지를 해주겠지만."은 아버지의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부터 늘 들어오던 말이었지만, 한참 감수성 예민하던 고교 시절엔 너무 서러워 한 번은 펑펑 울면서 "공부 잘해서 효도하는 건 난데, 왜 재산은 다 동생이 가져가냐?"면서 아버지에게 반발했다.




초등학교 시절, 반장은 남학생만 할 수 있었다. 여학생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부반장만 할 수 있었다. 출석번호도 남학생은 1번부터 시작하고 여학생은 51번부터 시작했다. 아무도 이게 잘못된 거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뭔가 개운치 않았지만, 그냥 받아들이면서 살았다.


어제 저녁, 온라인 새터에 참여하는 딸 옆에서 함께 지켜보다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단과대학 내 예닐곱 개 학과 대표와 부대표가 인사를 하는데 딱 한 학과만 빼고 대표가 모두 남자였다. 남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학과도 아닌데 왜 남학생들이 대표를 하고 여학생은 부대표를 할까? 우연의 일치라고만 치부해버리기에는 왠지 석연치 않았다.  




수습기간을 마친 후 선택한 첫 임용지는 고향이었다. 백일 남짓밖에 되지 않은 딸을 친정어머니 조력을 받아가며 키우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문제는 내 고향이 남녀차별이 꽤나 심한 곳이라는 거다. 친정아버지가 성불평등한 발언을 하셨던 것도 그 시절, 그 지역에서는 그게 일반 상식으로 통용되었다는 반증이다.


발령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최고 인사권자가 젊은 여성이 중간관리자로 부임하는 것을 반대했다. 아직 서른도 안 된 '여직원'이 팀장이 되어 자신보다 스무 살 이상 많은 '직원들'을 아래 직급으로 두면서 일하도록 하는 것을 눈 앞에서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분의 편견 탓에 후미진 곳에 자리한 도서관이 첫 발령지가 되었다.


덕분에 책은 원 없이 읽었다. 태평성대만은 아니었다. 민원인을 '아줌마'라고 호칭하면서 싸우는 안내실 직원분에게 주의를 주는 건 다반사였다. 잡초가 무성해도 뽑으려 하지 않는 공무직 분을 설득하기 위해 만삭인 내가 호미 들고 먼저 풀을 맸다. 점심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기계실 직원분을 인근 음식점에서 찾아 복귀시켰다 원성을 듣는 일도 종종 있었다.




1년 남짓, 나름 다이내믹한 생활 끝에 그토록 나를 반대했던 그분 '눈 앞에서' 일하게 되었다. 기획업무를 맡을 적임자가 없어 인사난을 겪다 결국 내게까지 기회가 왔다. 내가 맡은 업무 중 하나는 '양성평등'업무였다. 안 그래도 성불평등한 인사와 처우에 불만이 많던 내겐 문화를 바꿔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물론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셨던 그분은 끝까지 나를 외면했다. 보고 중에 결재판을 던지는 것도 예사였다. 성별과 나이가 유일한 편견은 아니었다. 자신과 출신이 같은 그룹만 두뇌 계층으로 인정하면서 노골적으로 편 가르기를 했다.


부서를 돌면서 이너써클만 모아 근무 중에 그들만의 '지적(쩍) 대화(intellectual dialogue)'를 했다. 절대 그 안에 포함되지 못하는 이들은 이 모임을 '지적 대화(pointing out conversation)'라며 폄하했다. 절대 존경할 수 없었던 이 분은 임기 종료 후 오래지 않아 돌아가셨다.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어젯밤 퇴근 후에 읽었던 책은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는데>였다. 똑똑했지만 가정 경제에 기여하기 위해 원하는 진로를 밟지 못하고 끊임없이 생계전선에서 뛰어야 했던 56년생 엄마의 일대기를 딸이 직접 펴낸 책이었다. 결혼 전에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서 꿈을 펼치지 못했던 이 분은, 결혼 후에는 남편의 폭력과 무능함을 견디다 못해 결국 이혼했다. 책을 읽다 보니 이 분의 삶이 낯설지 않았다.


52년생 친정 엄마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마 6.25 전후 대한민국에서 버텨내야 했던 많은 여성들의 생애 또한 유사하지 않았을까. 내 소원 중 하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책 한 권으로 남겨놓는 것이다. 여섯 남자 형제들 뒷바라지 때문에 학교 문턱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지만, 삼십 대 중반 이후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집념의 여인.


엄마의 기억력이 조금이라도 더 선명할 때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오늘은 엄마께 꼭 전화를 드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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