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한 달을 마무리하면서 어떻게 일상을 보냈는지를 정리하는 갈무리 포스팅을 블로그에 올리고 있다. 1월과 2월에는 달이 끝나기 하루 이틀 전에 올리는데, 3월에는 무려 사흘 전에 올렸다. 3월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가 가득했다는 방증이다. 아직 며칠 더 남았지만, 빨리 3월을 보내버리고 싶은 조바심도 가득했더랬다.
3월이 힘들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일이 너무 많았다. 작년 연말부터 일의 강도와 규모가 내 한계치를 벗어나기 시작하더니 이 기세가 올 3월까지 지속됐다. 다행히 이번 달에는 슬슬 원래 페이스를 되찾고 있다. 일이 많아지면, 내가 나만의 공간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만끽할 시간이 줄어든다.
지난 10년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활동은 단연 독서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편이지만 자기 계발류로 시작한 독서는 사회과학 서적으로 지평을 넓혔고 올해는 소설도 제법 찾아보고 있다. 외국어 공부는 의무감으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물론 배운 것을 허무하게 잊어버리곤 하는 엄청난 속도의 망각으로 인해 느끼는 좌절감도 상당하다.
요즘 가장 즐거움을 주는 건 웹툰이다. 시작은 애니메이션이었다. 재작년 큰 아이가 추천해준 <유리 온 아이스>를 시작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늪에 빠졌고, 급기야 올 초에는 라프텔을 내 돈 주고 결제까지 했다. 이어 레진 코믹스까지 섭렵해서 원 없이 웹툰을 감상하는 중이다. 학창 시절 이런 플랫폼이 없었던 게 어찌나 다행인지. 쉰을 3년 앞에 두고 뒤늦게 찾아온 덕질에 날밤도 샜더랬다.
늦은 시간까지 야근하고 돌아온 밤에도 좋아하는 웹툰을 정주행하고 난 뒤에 새벽녘에 잠들곤 하는 강행군을 이어갔다. 신체적 에너지는 고갈되지만, 정신적인 즐거움이 워낙 커서 좀처럼 웹툰 덕질을 끊기가 어려웠다. 애초에 균형이란 건 아슬아슬한 줄타기 사이에 찰나의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중심을 잡기가 어렵다면 메마른 영혼에게 단비 같은 기쁨이라도 실컷 줘야 하지 않을까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야밤 덕질행을 이어갔다.
지난주, 3개월 이상 심혈을 기울였던 큰 프로젝트가 무사히 마무리되고, 다행히 일이 어느 정도 안정궤도에 올랐다. 신기하게도 덕질을 향한 금단의 에너지가 살포시 강도가 약해졌다. 물론 그 전보다 상대적으로 약해졌다는 거지, 절대적인 시간 할애를 무자비하게 깎아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열기가 살짝 수그러들었다는 건, 그동안 집착에 대한 저의를 의심케 한다. 그동안 웹툰에 대한 나의 애정공세는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간신히 획득한 일순간의 자유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
웹툰 감상이라는 덕질을 제외한 내 스케줄은 꽤나 단순하다. 출근하기 전 한두 시간은 3종 외국어 공부에 할애한다. 점심 시간엔 종종 서점에 가서 책을 읽는다. 일주일에 2~3차례 퇴근 후 불어 수업이 있다. 불어 수업이 없는 날, 퇴근 전에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집으로 향한다. 저녁은 간단히 때우고 일어 공부나 글쓰기, 독서를 하리라! 현실은 물론 다르게 펼쳐진다.
내가 가장 기특한 날은 큰 아이와 함께 땅끄 부부 홈트를 할 때다. 이번 달에 서너 번 했던 것 같다. 퇴근 후에 독서를 하거나 미처 못 끝낸 일을 하기도 한다. 지난주부터 시작한 JLPT N2 스터디 숙제를 하며 저녁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활동으로 시작하든지 간에 기승전, 대부분 끝맺음은 웹툰 보기다.
웹툰을 능가할만한 강렬한 취미활동을 찾아봐야겠다. 최근 베토벤의 <월광소나타>가 언론에 등장해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배워볼까 싶은 마음이 가득했더랬다. 하지만, 코로나 기간 동안에는 아무래도 마뜩지 않을 듯 싶다.
마침 오늘 읽은 김영민 교수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책의 말미에 소개된 흥미로운 영화들에 관심이 간다. 오늘 저녁은 웹툰 대신 영화로 시간을 꽉꽉 채워봐야겠다. 버닝, 박화영, 땐뽀걸즈, 살아남은 아이. 마침 모두 다 넷플릭스에 있다. 설마 이 네 편을 모두 다 보고 자정 넘어 웹툰으로 마침표 찍는 건 아니겠지?
배용준 홀릭으로 한국을 찾았던 일본 중년 여성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이래서 남의 말은 쉽게 하면 안 되는 것 같다. 웹툰을 좋아하는 세 아이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딸내미들. 언젠가, 딸내미가 낸 작품을 감상하는 엄마로 등극할 거라 기대해보며 웹툰 덕질에 대한 소소한 변명을 더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