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부터 버벅댄다. 내가 쓴 시나리오 이건만 용어가 어렵고 외워야 할 사항이 많아서 발음이 자꾸만 뭉개진다. 아나운서들이 하듯이 입술 사이에 볼펜이라도 끼고 발음 연습부터 해야 하려나? 목이 왜 이리 자꾸 타고 입술은 바짝바짝 마르는지...
지난주에 석 달 남짓 심혈을 기울여 만든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언론의 반응은 뜨거웠고 긍정적인 기사도 상당했다. 낯선 분야를 공부하면서 힘들었던 과정과 밤새, 주말 내내 보고서를 쓰면서 고생했던 시간들을 다 보상받고도 남았다.
심지어 방송국에서 연락도 왔다. 물론 인지도가 높은 방송은 아니었고, 생방송이 아닌 녹화방송이지만. 내가 주축이 되어 마련한 어젠다를 대외에 내 목소리를 통해 전달한다는 점에서 무척 뿌듯했다. 덜컥 제안을 받아들이고 촬영일 전날에서야 스크립트를 손보기 시작했다.
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료를 안 보고 허공을 응시하며 이야기하려니 자꾸 막힌다. 내가 최대한 쉽게 풀어서 쓴 문장인데도 여전히 어렵다. 고치고 또 고치고 외우고 또 외웠다. 퇴근 후에는 막내딸에게 질문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중학교 1학년 막내딸 앞에서 연습하는 건데도 살짝 긴장이 된다. 암기가 완벽하지 않아 자꾸 버벅대게 된다. 첫 번째 질문은 나름 경청하면서 내 답변이 스크립트와 얼마나 일치하는지 살피기도 한다. 통쾌하다는 표정으로 놓친 단어들은 지적도 해가면서.
질문은 총 8개. 질문마다 답은 약 2분이 소요된다. 아이가 슬슬 지루해한다. 스크립트에 핸드폰을 몰래 숨겨서 보다 급기야 내게 압수까지 당했다. 약 20분에 걸쳐 한 번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막내가 냉큼 내뱉는다.
000씨, 다시 제대로 외우세요
아니 엄마 이름을 이렇게 함부로 불러도 되는 건가? 자기는 이미 한 번 대역이 되어줬으니 이제 오빠나 아빠를 대상으로 연습하란다. 냉소적인 우리 집 두 남자를 대상으로 뭔가 부탁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다정다감하고 배려심 깊은 큰 딸에게 부탁해보고 싶지만 요즘 중간고사 기간이라 바쁘다.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가며 홀로 맹연습에 몰입했다. 두어 번 리허설을 하니 벌써 지친다. 나의 스피치 멘토 김미경 대표님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라고 엄청 강조하셨는데. 뭔가 해야만 하는 일이 생기니 자꾸 급하지 않은 다른 일들이 하고 싶어 진다.
드디어 결전의 날. 아나운서 분은 역시나 아름다우셨다. 용어가 어려운지라 살짝 긴장하는 모습에서 동병상련의 감정이 느껴졌다. 긴장감 감도는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질문과 대답을 끝냈다. 내가 준비했던 답변은 거의 다 소화했다. 대본을 전혀 보지 않겠다는 내 나름의 목표도 달성했다.
아나운서 분께서 지금까지 진행하면서 이렇게 완벽하게 암기해서 인터뷰를 한 사례는 처음이라며 폭풍 칭찬을 해주셨다. 오랜만에 밥값을 한 듯 싶어서 기분이 엄청 좋았지만 자랑할 곳이 마땅치 않다. 아이들은 당연히 시큰둥할 테고.
나의 열혈 응원군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역시나 무척 기뻐하신다. 생각해보니 인터뷰 제안을 받았을 때 무조건 하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건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3년 후면 반백이 되는 나이의 딸이지만, TV에 나온다면 얼마나 기뻐하실지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가끔씩 큰 행사에서 인사말이나 토론을 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국제행사장에서는 영어로 하기도 했다. 고마운 분들이 일부분을 영상으로 촬영해 공유해주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무반응인 영상도 부모님 곁으로만 가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딸내미의 흔적으로 격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