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여름, 아빠 칠순 기념 하와이 여행을 계획했다. 정작 주인공인 아빠는 빠지고 우리 가족과 엄마가 함께 하와이로 떠났다. 여행의 꽃은 역시나 맛있는 것을 먹고 평소에 못사본 것들을 눈 질끔 감고 왕창 사는 것. 쇼핑센터에서 만족스럽게 쇼핑을 마친 후, 근처에 보이는 푸드트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체 몇 명이냐고 묻는 질문에 아이들이 대답을 미적거리자 보다못한 엄마가 'six'라고 말씀하셨다. 친절하게 손가락까지 펴 보이시면서. 이 한마디를 하시고 엄마는 하와이 여행 내내 광대승천 상태로 보내셨다. 이후 가족모임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로 등극했음은 물론이다.
cinq
역시 3년 전, 프랑스로 업무 출장을 가게 됐다. 일행들과 1층 로비에서 만나 조식을 함께 하러 이동했다. 어쩌다 보니 내가 제일 선두다. 식당에 들어가려고 하니 일행이 몇 명이냐고 묻는다. 출장 직전에 부랴부랴 공부해둔 몇 개 안 되는 어휘를 쥐어짜 보지만, 문장을 다 말할 엄두가 안 난다.
어차피 정확한 문장은 기억도 안 나고 몽글몽글한 불어 발음을 원어민이 알아듣게 말할 자신도 없다. 그저 기억나는 숫자 '5'만 말했다. 우리는 다 함께 앉을 수 있는 여유로운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가슴속에서 왠지 모를 뭉클거림과 자신감이 샘솟았다. 엄마가 느끼셨던 그 뿌듯함이 바로 이거였구나.
I'm 13 years old now.
내가 영어와 30년 이상 친해질 수 있게 만들어준 마법의 문장이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 소풍에서 외국인을 만났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외국인이었다. 마침 나는 아빠에게 기초 영어단어를 배우고 있던 때였다. 친구들이 나를 외국인 앞으로 인도했다.
머리가 하얘지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몇 살이냐고 묻길래 책에서 봤던 문장을 구수한 발음으로 말했다. 이 한 문장으로 나는 학교에서 영어 엄청 잘하는 애로 소문났다. 소문에 부응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 고난이 날 기다리고 있었지만, 영어가 좋아졌다.
Je ne sais pas
퇴근 후에 불어 수업 듣는 게 큰 기쁨 중 하나다. 하지만 워낙 하는 둥 마는 둥 공부해 왔는지라 구사할 수 있는 문장과 단어가 매우 제한적이다. 결국 수업 시간에 가장 많이 쓰는 문장은 딱 2개로 정해져 있다. "몰라요(Je ne sais pas)"와 "잊어버렸어요(J'aioublié)"다.
더듬거리며 단어 몇 개를 열거하는 수준이지만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소통한다는 기쁨이 무척 크다. 거의 못 알아듣지만 어쩌다 아는 단어라도 하나 들리면 자존감이 수직 상승한다. 귀 뚫는다는 명목으로 넷플릭스에 있는 프랑스 영화와 일본 애니메이션을 죄책감 없이 맘껏 즐기는 날도 이어지고 있다.
Guten Morgen!
영어 스터디 멤버분이 tandem이란 앱을 추천해줬다. 언어교환 프로그램으로 이미 익숙한 탠덤이란 발음 대신 '탄뎀'이라고 읽는다. 발음이 익숙해 혹시 독일에서 시작됐나 싶어 찾아보니 본사가 베를린에 있다. 문득 고등학교 1학년 첫 독일어 수업이 생각난다.
눈이 부리부리하게 큰 다부진 체격의 한 선생님께서 교실 문을 여셨다. 성큼성큼 들어오시며 문에서 가깝게 앉은 학생에게 말을 거신다. "Guten Morgen(good morning)!" 학생들은 꿀 먹은 벙어리. 신학기라 가나다순으로 자리배치를 했기에 곧 있으면 내 순서다. 드디어 내 앞에 당당하게 서서, 다시 똑같은 문장을 말씀하신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따라 했다.
그 뒤로 선생님의 과장스런 감탄사와 칭찬 세례가 이어졌다. 물론 독일어로. 1학년 독일어 수업은 거의 독일어로 진행됐다. 첫 수업 때 얻은 자신감 덕분에 독일어가 좋아졌다. 공부하지 않은 지 30년 가까이 되다 보니 이제는 기억나는 단어도 몇 개 안되지만 독일어는 내가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싶은 10개 외국어 목록에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출근해야 해서, 이제 자야 해요. 내일 다시 이야기 나눠요.
탄뎀 앱을 깔고 프로필을 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어를 공부하는 일본인과 프랑스인들이 문자를 보내왔다. 일어, 불어, 영어, 한국어가 동시에 등장하는 가운데 느꼈던 설렘과 기쁨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30분도 안돼어 슬슬 피곤해졌다. 불어, 일어 모두 아직 왕초보인지라 구글 번역기 없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일본인보다 프랑스인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내가 답하면 곧이어 바로 답이 온다. 프랑스와 시차가 꽤 나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시차 덕분에 자연스럽게 저 문장을 끝으로 즐겁긴 했지만 너무 큰 에너지가 소진됐던 첫 탄뎀 체험기를 마쳤다.
그냥, 앱을 삭제해 버릴까?
일요일 하루 반짝 여러 명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 뒤, 월요일 퇴근 후에는 앱을 확인하는 게 두려워졌다. 팔로워가 또 생겼고 새로운 친구가 내게 또 말을 걸어온다. 어제 아쉽게 이야기를 끝맺은 몇 친구들도 메시지를 보내왔다. 실력도 안 되는데, 대화를 나누려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앱을 삭제하려다 실력을 키운 후에 다시 시도해보기로 하고 일단 홈 화면에서만 앱을 지웠다.
외국어를 잘하고는 싶은데, 머리 싸매며 공부하고 싶지는 않다. 이루기 힘든 도전적인 꿈이라도 버리면 인생이 좀 더 수월해질 텐데. 꿈에 걸맞을 만큼 강한 의지력이라고 타고났다면 삶의 부조화가 꽤나 해소될 텐데.
만만하게 봤던 JLPT N2. 기출문제를 풀어보니 꽤나 어렵다. 시험이 이제 두 달 남짓밖에 남지 않아 일본어 공부를 하겠노라고 일찌감치 도서관에 왔지만, 딱 20분 공부하고 나니 벌써 지겨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