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데이가 사라졌다>라는 영화를 흥미롭게 봤다. 스웨덴 여배우 노미 라파스가 1인 7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각기 다른 성향과 성격, 취향을 지닌 일곱 쌍둥이 역할을 수행한 노미 라파스. 어쩌면 우리 안에 이렇듯 다양한 자아가 내재되어 있는 건 아닐까?
얼마 전에는 <수요일이 사라졌다>라는 일본 영화에 대해 알게 됐다. 7개 다중인격을 지닌 한 남성의 삶을 스케치한 영화다. 우리나라 드라마 <킬미 힐미>에서도 지성은 7개의 페르소나를 지닌 인물로 분해 감동스러운 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7개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2개 이상의 서로 다른 자아가 내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 자주 출현했고, 지금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개복치와 유사한 모습이다. 그다지 예민한 편이 아닌 것도 같지만, 소심 끝판왕일 때가 많다.
이정섭 작가의 <내가 멸종위기인 줄도 모르고>란 책을 보면 인간 개복치인지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가 있다. 이 작가에 따르면, 다음 항목 중 3개 이상이 해당되면 개복치가 맞다.
1. '카톡'이나 문자는 편한데 전화는 부담스럽다
2. 버스에서 벨을 잘못 눌러 한 정거장 먼저 내린 적 있다
3. 주문한 음식이 안 나와도 '언젠가 주겠지'하며 망부석처럼 기다린다
4. 주 3일 이상 약속이 잡히면 전주부터 피곤하다
5.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에너지가 '빨리는' 편이다
6. 가끔 아무것도 하기 싫은 '만성 싫어증'에 걸린다
7. 사교 대화는 하루 15분이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8. 다툼은 피곤한 일이라 가능한 한 피하고 싶다
9. 적게 누리더라도 나만의 방식으로 살고 싶다
9개 중 무려 8개가 해당된다. 3번은 예외다. 성격이 급하고 식탐이 충만한지라 음식이 늦어지면 재촉할 만큼 용감해진다. 먹을 때만큼은 타고난 성향을 이겨낼 만큼 욕망에 충실해지는 것이리라.
문자 대화를 즐긴다. 전화를 하려면 심호흡을 하고 할 말을 미리 정리해두곤 한다. 갑작스러운 전화통화를 싫어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문자를 편하게 하는 편도 아니다. 카톡이나 메일, 문자 한 번 보낼 때마다 몇 번씩 읽어보고 오탈자를 고치고 오해할 소지가 없는지 꼼꼼하게 체크한다. 잘못 보내면 한참 지나 한밤중에 홀로 이불 킥을 하기도 한다.
버스에서 벨을 잘못 누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잘못 누르면 그냥 내린다. 벨을 누르기 전부터 노심초사한다. 벨 위치가 너무 멀면 일어나야 할 시기를 가늠한다. 지금 누르면 너무 빠르나? 아, 누군가가 대신 눌러줬으면...
사람을 만나기 전에 토킹 포인트부터 정해둘 때가 많다. 그래서 피곤하다. 아무 생각 없이 만나는 건 학창 시절 친구들 정도. 직장동료 중 정말 친구 같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편한 건 매한가지다. 그래서 사교 대화가 15분이면 적당하다는 데 200% 공감한다. 더 이상 함께 하면 급속도로 방전된다.
왕성한 대인관계를 피할 수 없는 시즌이 지나면 잠행 모드로 전환한다. 몸이 피곤하고 마음은 더 피곤하다. 매일 에너지 총량 법칙을 충실히 따라온 내 신체 리듬이 평상시 궤도를 일탈했기에 피로도가 더욱 심하다. 새로운 궤적을 그리고 싶어 질 때까지 개복치로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일상이 회복된다.
성마른 기질 탓에 예전에는 자주 다투곤 했다. 지금은 싸우는 것도 싫다. 대립각 세우면 소심한 성격 탓에 가슴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서너 곱절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갈등을 피하다 보니 정작 목소리 높여야 할 때마저도 비굴 태세를 버리지 못하기도 한다.미니멀리즘을 실천하며 무한 소비를 장려하는 자본주의 상술의 노예가 되지 않겠노라며 결의를 다진다.
하지만, 늘 이런 개복치로만 사는 건 아니다. 문득, 혁명가처럼 의욕으로 가득 찰 때가 있다. 이 페르소나가 나를 찾아오면 세상에서 못해낼 것이 없다. 혁명가 모드로 전환했을 때 기록해둔 글을 보면 열혈전사 못지않다.
이럴 때는 일상도 찬란하기 그지없다. 새벽 기상은 기본이다. 매일 하루가 외국어 공부와 독서, 운동으로 촘촘하게 짜여있다. 짧은 시간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겠노라는 확고한 의지가 있기에 가능하다. 회사 생활도 순조롭다. 큰 무리 없이 대외활동도 거뜬히 해낸다.
이렇게 눈부신 여정에 들어서면 기쁜 마음에 기록도 더 자주 남기게 된다. 개복치 힐데로 사는 시간도 만만치 않건만, 힐데의 역사 기록에 동참하는 건 주로 혁명가 힐데다. 역시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편이다.
혁명가 힐데의 촘촘한 시간관리에 응원과 격려 댓글을 남기는 이웃님들께 감사한 마음이 가득하다. 하지만 온라인으로만 나를 아는 이들을 오프라인으로 만날까 봐 두렵기도 하다.
마침 어제부터 혁명가 모드로 들어섰다. 대배우 윤여정님의 오스카 여우조연상 수상 쾌거에 오늘도 동기부여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혁명가일 때는 내 가슴 속 촛불을 횃불로 변신시키고 싶다는 열망에 이글거린다. 내 자신이 나 스스로에게 롤 모델이 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