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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Apr 28. 2021

운 좋은 하루

학창 시절에 배웠던 현진건 작가님의 <운수 좋은 날>에 등장하는 주인공, 김첨지는 아침부터 운이 좋았다. 인력거에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기분으로 부지런히 일해서 퇴근길에는 아내가 좋아하는 설렁탕을 사들고 귀가한다.


오늘은 내가 이런 김첨지가 된 기분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운이 팡팡 쏟아졌다. 조금 삐그덕거리는 지점도 있었지만, 금방 해결이 되었다.




첫 번째 운은 눈을 뜨자마자 다가왔다. 어젯밤 자기 전에 포스팅한 네이버 블로그 책 리뷰 글에 평소에는 댓글을 잘 남기지 않는 이웃님의 피드백이 있었다. 물론 비밀글이었지만. 반가운 마음에 바로 댓글을 남겼다.

https://blog.naver.com/justina75/222325470761

역시, 난 운이 좋아!


두 번째 운은 출근 전 아침시간 동안 이어졌다. 밤낮이 바뀌어 평소 같으면 한밤중이었을 남편이 아이들 아침을 챙겨줬다. 덕분에 느긋하게 TED ED 쉐도잉도 하고, 일본어 스터디 숙제도 하고, 불어 수업 복습도 했다. 공부 인증샷을 나누는 스터디 멤버 분과 사진을 나누면서 오늘 하루도 알차게 보내자며 서로를 격려했다.

역시, 난 운이 좋아!




세 번째 운은 출근길에 생겼다. 평소 출근 시간에는 엘리베이터가 층마다 멈추곤 하는 탓에 늘 심장 쫄깃함을 맛보면서 경보 수준으로 출근하는 발걸음을 재촉하곤 한다. 오늘은 운 좋게도 평소보다 3분 정도 일찍 집에서 나설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다른 층에서 전혀 멈추지 않는다.

역시, 난 운이 좋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무심코 벽면의 거울을 보니 뭔가 이상하다. 아, 평소에는 출근 직전에 머리에 에센스를 적당히 발라주는데 오늘은 그걸 깜박한 거다. 머리 감은 지 얼마 안 되고, 드라이로 대충 말린 반곱슬 머리카락이 자유분방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대로 15분을 바람맞으면서 걸어가면 사자 갈기까지는 아니더라도 포메라이온급 수준으로 풍성 해질 텐데. 예전에 헤어 에센스를 깜박했던 당시, 회사 로비에서 만난 한 지인분은 내 머리를 보고 "앗, 머리가..."라면서 말잇못이었다. 오늘 내가 얻은 3분은 에센스 바르는 시간과 맞바꾼 시간이었다. 역시,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다행히도 주머니에 헤어밴드가 잡힌다. 잔머리들을 물로 대충 정리하고 밴드로 묶는다면 오늘 하루 잘 보낼 수 있을 듯하다. 눈 질끈 감고 로비에서 빛의 속도로 화장실까지만 직행할 수 있다면 정리안 된 머리카락을 들키는 걸 최소화할 수 있다. 다행히, 미션 클리어!

역시, 난 운이 좋아!




아침부터 바쁘다. 바빠서 화낼 짬도 없고, 지루할 짬이 없어서 좋다. 중요한 보고를 한 껀 끝내고 숨 고르기를 하던 차에 반가운 지인으로부터 오랜만에 소식이 도착했다. 작년에 자주 소통하다 몇 달간 적조해서 근황이 궁금하던 차였다. 잊지 않고 연락을 주신 그분이 고맙다. 이제 예전처럼 종종 연락하면서, 동기부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 기쁘다.

역시, 난 운이 좋아!


이번 주에는 점심 선약이 꽤 있었다. 그런데 거리두기가 강화돼서 사적 모임이 전면 금지됐다. 부랴부랴 점심 약속을 모두 취소했다. 갑자기 생긴 점심 1시간. 어떻게 보내야 후회가 없을까? 세 가지가 떠오른다. 신체 건강을 챙기기 위해 아파트 단지 안 피트니스센터에 방문해서 운동하기. 정서 건강을 챙기기 위해 회사 근처 서점에 가서 공짜로 책 읽기. 뇌 건강을 챙기기 위해 회사 근처 도서관에 가서 외국어 공부하기.


오늘 나의 선택은 몸 건강 챙기기다. 며칠 전부터 두 딸내미들과 다이어트를 하면서 매일 체중 인증샷을 공유한다. 4주간 목표 감량을 지키지 못하면 무시무시한 페널티가 부과된다. 내 목표는 3kg 감량. 못하면 1주일 동안 웹툰 감상 금지다. 기필코 감량해야 한다.


피트니스 센터에 도착해서 확인하니 큰 딸의 톡이 와 있다. 피트니스로 오겠단다. 딸이 조금 있으면 함께 할 거라고 생각하니 더 신난다. 딸에게 롤모델이 되고 싶은 욕심에 자세도 한껏 더 바르게 하고 웨이트 량도 좀 더 올려본다. 요즘 계속 감량 중인 딸이 검은색 옷으로 입고 도착했다. 안 그래도 내 눈에 이쁜 딸, 슬림해져서 더 이뻐 보인다. 이렇게 이쁜 아이가 내 딸이 되고, 건강하게 잘 자라 운동도 함께 하고 친구처럼 말동무도 되어 주다니.

역시, 난 운이 좋아!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가쁜 숨을 몰아쉬고 집으로 향했다. 불어 수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번 달 수업이 이제 딱 두 번밖에 안 남았다. 가끔 다른 한 분이 참여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나 홀로 수업이다. 수강생이 한 명이면 폐강시키는 선생님도 계시다던데, 이번 수업을 진행하시는 선생님은 한 명도 괜찮다면서 개강을 하셨다. 다음 달에도 수업을 여신다고 하셔서 이렇게 과외 같은 수업을 계속 들을 수 있다.

역시, 난 운이 좋아!


김첨지의 <운수 좋은 날>의 끝자락에는 김첨지 인생의 운 나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내게 다가온 하루는 퍼펙트한 운수 좋은 날이었다.


운이 좋다고 생각해서 운수 좋은 날이 된 건지, 진짜 운수가 좋아서 운이 좋다고 생각한 건지. 선후는 불분명하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오늘 나는 참 운이 좋았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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