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라는 작가를 알게 된 건, 불과 2년 전이다. 그림 동아리를 함께 하는 동료분이 <데미안>에 버금가는 책이라면서 <자기 앞의 생>을 추천해 주셨다. 데미안이라면 내 인생 책 중 하나이기에 주저하지 않고 바로 빌려봤다. 너무 기대가 커서일까? 데미안만큼의 큰 감흥은 없었다.
물론 작가의 삶은 충분히 흥미로웠다. 로맹 가리라는 이름으로 이미 큰 명성을 얻었음에도,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이 책을 냈고 프랑스에게 가장 권위 있는 콩쿠르상을 한 번 더 수상한다. 이혼했지만 두 번째 부인이었던 진 세버그가 자살한 후, 1년 뒤 그도 그녀 뒤를 따른다, 권총 자살로.
로맹 가리를 다시 찾게 된 것은 김민영 작가님의 <나는 오늘도 책 모임에 간다>에서 소개된 자서전적 소설 <새벽의 약속>을 만나게 되면서였다. 성공을 거둔 자들의 뜨거운 삶이 여과 없이 담겨있는 자서전과 평전은 가장 좋아하는 장르 중 하나다. 읽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불편했다. 아들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엄마의 사랑이 괴기스러울 정도로 과장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지나칠 정도의 기대를 퍼붓고, 가혹할 정도로 다그치는 엄마를 이해하게 된 것은 책장을 덮기 전 마지막 몇 페이지에 이르러서였다. 그를 위해 남겨둔 250통의 편지. 스포가 될 듯싶어 자세한 이야기를 남기지는 못하겠다. 갑자기 가슴이 찌릿찌릿 아파왔다.
토요일 아침. 도서관에 가는 걸 포기하고, 넷플릭스에 있는 <새벽의 약속> 영화를 감상했다. 프랑스에서 떠오르는 신예 배우 피에르 니네이가 로맹 가리로 분했다. 연기파 배우 샤를로뜨 갱스부르가 광기와 열정에 가득 찬 엄마 니나 카체프 역할을 맡았다.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만큼 애절한 연기. 갑자기 책을 다시 한번,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읽고 싶어 졌다.
이런 작품을 만나면 이중으로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작가로서의 로맹 가리의 삶. 엄마로서의 니나 카체프의 삶. 내 인생 목표는 작가다. 꿈을 이루겠노라고 2년 전에 책을 한 권 냈었다. 작년에 공저해 둔 책은 올 하반기에 출간 예정이다. 하지만 글 쓰는 생산자로 보내는 시간은 극히 적다. 남이 써둔 글을 읽고, 남이 만들어놓은 영상을 보고, 남이 알려주는 수업을 듣고, 남이 지시하는 일을 하면서 내 시간의 대부분을 보낸다.
로맹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던 중 장티푸스에 걸려 생사를 오간다. 다섯 번 수혈에도 출혈이 그치지 않아 의사들은 몇 시간밖에 살지 못할 거라고 단념하고 종부 성사를 받게 한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그는 엄마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전에는 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빅터 프랭클 박사가 마무리 짓지 못한 작품을 완성해서 세상 밖으로 내고 싶다는 열망을 간직한 덕에 <죽음의 수용소에서>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내게 글쓰기는 이처럼 생사의 고비 앞에서 생명줄을 연장할 만큼 절실하지 않다. 그저 쓰고 싶은 주제가 생기면 가슴이 살짝 콩닥거리는 정도에 불과하다.
로맹 가리의 삶 못지않게 내 가슴을 절절하게 만든 건, 니나 카체프의 삶이었다. 철저하게 아들을 위해서 희생과 헌신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 나 역시 세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 아이들이 지닌 달란트를 충분히 발휘하게 해주고 싶다. 하지만 지금처럼 마냥 내버려 두는 방임 스타일로는 그런 기적은 여간해선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다. 아니, 내게는 아이들의 삶보다는 내 삶이 더 소중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니나가 로맹에게 늘 했던 말은 "너는 빅토르 위고나 톨스토이처럼 위대한 작가가 될 거다.", "너는 프랑스 대사가 될 거다.", "너는 영웅이 될 거다."였다. 그리고 로맹은 엄마의 말을 다 실현했다. 그러나 대다수 아이들은 엄마의 바람 만으로 거저 크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한참 어릴 때는 이런 꿈을 심어주는 이야기가 통할 때가 있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작품을 모은 문집 제목은, "노과기(노벨과학상, 기다려라)!"였다. 당시 나는 연구개발업무를 맡으면서 노벨 과학상에 한참 관심이 많을 때였다. 노벨상 시즌에 옆 나라 일본과 비교해 실적이 전무한 우리나라 상황이 너무 안타까워 문과 성향이 다분한 아이에게 과학자의 꿈을 이식하려고 노력했더랬다. 아직 순진무구했던 큰 아이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시늉도 했고. 물론 큰 아이는 얼마 안 있어 정신을 차렸고, 나도 둘째, 셋째를 키우며 제대로 현실 자각을 했다.
로맹은 비범했다. 그는 엄마의 꿈을 실현시켜주기 위해 함께 노력했다.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 나는 학교를 잠시 쉬고 완전히 내 방에 틀어박혀 승부에 매진하였다. 나는 내 계산에 따라 <전쟁과 평화>와 맞먹는 양인 삼천 장의 백지를 앞에 놓았고, 어머니는 옛날에 발자크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옷을 본떠 아주 헐렁한 실내복을 만들어 주었다. 하루 다섯 번씩, 어머니는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와 음식 접시를 테이블 위에 놓아두고는 발끝으로 걸어나갔다."(p. 180)
나는 글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도 없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은 우연히 갖게 됐다. 책을 읽다 보니 즐겁고 행복해서, 나도 내가 쓴 책을 통해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싶다고 생각한 게 전부다. 이런 소박한 바람을 로맹 가리의 원대한 꿈에 비견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방자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쓰고, 생각하고, 읽고, 배우고 싶다. 로맹 가리만큼 천재성은 없기에 불후의 명작을 남기지는 못하겠지만, 로맹 가리처럼 멋진 작가의 글을 음미할 정도의 식견과 안목은 갖추고 싶다. 로맹 가리만큼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는 없겠지만, 단 한 명이라도 내 글을 읽고 공감해주는 이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다 영웅이 될 수는 없다. 모두가 다 영웅이라면, 영웅이라는 단어 자체가 무의미하지 않을까. 어제 영화를 본 직후부터 뭔가 감상을 남기고 싶기는 한데, 감정 정리가 되지 않아서 힘들었다. 쓰다 보면 회한 조의 넋두리가 될까 싶어서 저어하는 마음이 컸다. 쓰다 보니 다행스럽게 정리가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것. 오늘 목표는 N2 공부를 다섯 시간 이상 하는 것과 책을 다섯 권 빌려서 두세 권 정도 읽는 거다. 오늘치 미션을 다 끝내면, 부지런히 하루를 보낸 내게 상을 줘야겠다. 넷플릭스에 있는 <자기 앞의 생> 영화 감상 티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