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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May 09. 2021

색채 소풍

장석주 시인님의 <색채의 향연>이라는 책을 만났다. 장 시인님은 "세상은 색의 향연"이며, "색의 향연 속에서 우리 감정은 화사"(p. 11)해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세상이 온통 우중충한 잿빛이었다면 삶도, 사랑도 이리 빛나지는 못했을 거라고 단언한다.


문득, 세상을, 내 감정을 더욱 찬란하게 만들어주는 색채와 관련해, 힐데 버전의 단상을 남기고 싶어 졌다. 단상이라고 하니 거창해 보인다. 그저 몇 가지 색깔에 관련된 내 경험을 두서없더라도 글로 남겨놓고 싶었을 뿐이다. 우물쭈물하다 보면 쓰고 싶다는 휘발성 의욕이 종적을 감출 테니 독서 후 감동과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주말이 적기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깊은 사유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칠고 힘든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 한 자 쓰시는 장 작가님에 필적할 수는 없는 노릇. 색채에 대한 그분의 글을 필사하고 그분의 글에 이어 관련된 내 추억의 끈을 덧붙여보려고 한다.

 

우주는 두 가지의 기운을 다 취해야 마침내 완전하다. 흑은 삼키고 백은 내뱉는다. 만물은 그 사이에서 변화를 타면서 순환하고 조화를 이룬다. 따라서 흑과 백은 천지에 교차하는 낮과 밤이 그러하듯 어느 한쪽이 우월하지 않다. 흑과 백은 바둑돌의 흑돌과 백돌이 그러하듯 평등함으로써 세상이 편안하다. 이 세상은 흰색과 검은색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p. 7)


대학 3학년 여름 방학 때 배낭여행을 갔다. 난생처음 외국에 나가는 거라, 100% 자유여행은 두려워 호텔팩을 했다. 국경 이동과 숙소 체류는 함께 하되, 여행은 각자 하는 식이었다. 일행 중 3주 여행기간 내내 검정 옷만 입던 이가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늘 검정으로만 도배했던 그 친구의 영향 탓인지, 이후 내게 검은색은 도회지 느낌 물씬 풍기는 세련된 색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지금도 흰 옷보다는 검정 옷을 선호하는 이유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 때마다 <탐구생활>이라는 책 한 권이 숙제로 주어졌다. 과학탐구실험 비슷한 것들이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한 번은 검은색과 흰색 중 어떤 종이가 햇빛을 더 잘 흡수하는지가 문제였다. 돋보기로 초점을 맞추고 어떤 색의 종이가 더 잘 타는지를 지켜봤다. 어떤 종이 위에 있는 눈이 더 빨리 녹는지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것 외에도 많은 실험을 했을 텐데 유독 이 것만 기억나는 이유는 내 정수리를 뜨겁게 달구던 태양의 열기가 아직도 생생하게 체세포에 남아 있어서일까?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바둑을 배우고 싶었다. 아버지는 바둑은 너무 재미있어서 배우게 되면 공부를 등한시하게 되니 대학을 간 후에 배우라며 알려주지 않으셨다. 유튜브나 네이버도 없던 시절. 바둑 배우기는 포기하고 남동생과 오목이나 장기를 두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어른이 된 지금, 원하면 언제든지 바둑을 배울 수 있는데도, 이제는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지난달 초, 아이들과 함께 <히카루의 바둑>이라는 애니메이션을 시청했다. 20년 전에 나온 애니를 이제야 본 거다. 새로운 영역을 접하면 무조건 따라 하는 우리 가족. 당장 바둑 두기에 도전했다. 물론 둘 줄 아는 사람은 남편 외에는 없다. 기본 규칙도 거의 모른 상태로 남편의 훈수를 조금씩 받아가며 아들과 바둑을 뒀다.


체스나 스플랜더, 다빈치코드처럼 두뇌를 조금 써야 하는 보드게임에서는 나는 늘 아들에게 진다. 바둑도 마찬가지였다. 어마어마한 차이로 불계승을 거둔 아들은 의기양양했다. 며칠 후 나는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고, 이번에는 딱 30집 차이로만 졌다. 이겼는데도 아들은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우울해했고,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아마 18급도 안될 것 같은 초초 아마추어 수준의 바둑실력이 내 행복을 희석시키지는 못했다. 흑과 백이 공존하는 바둑은 우리 집에선 즐거운 유희와 적정한 선의 긴장감을 안겨주는 훌륭한 매개체다.


파랑은 어떤 경우에도 비매품이다.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고귀해서다. (중략) 파랑은 구원, 안식, 피안의 계시적 예시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파랑의 왕국으로 망명하고 싶다. (pp. 54-55)

소름이 돋을 만큼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에 서 있던 그 찰나, 내 영혼은 정화된 느낌과 함께 단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황홀경에 들었다. 오,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마저 잊고 살다니! 사십억 년 된 지구에서 겨우 칠팔십 년을 사는 우리는 인생의 날들이 마치 영원히 이어질 것인 양 착각하며 먹고사는 일에 파묻혀 하늘을 잊고 산다. (p. 59)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신작 <클라라와 태양>에는 "등급이 높은 파란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p. 353)가 등장한다. 인공지능로봇이 인간의 친구로 등장하는 미래 세상이 인간 문명과 정신세계의 성장이 아니라, 견고한 신분제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과거로의 회귀라니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상층계급이 입는 옷은 '파란색'이라는 것! 지금도, 미래에도 파랑이 고귀한 색임에는 틀림없다.

 

학창 시절 운동회 때면 백군과 청군으로 나눠서 대항전을 펼쳤다. 백군보다 청군일 때 왠지 모르게 청량한 느낌을 가졌던 것 같다. 조직에서 단합대회를 할 때면 심심치 않게 깔맞춤을 요구하기도 한다. 파란색이 주된 컬러일 때는 덜 당황스럽다. 블루 계통 옷이 그나마 다양하게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에는 파란색을 나타내는 표현이 그리 많지 않다. 비슷한 군으로 하늘색, 남색, 청색, 군청색 정도 생각이 난다. 작년 큰 딸이 수채화를 그릴 때 물감 속, 많은 파란색의 종류에 혀를 내둘렸던 기억이 난다. 울트라 마린, 미젤로 블루, 코발트 블루, 마린 블루, 세룰리안 블루, 프러시안 블루, 인디고, 네이비 블루... 이렇게 다양한 언어로 파랑을 식별하고 음미하고 향유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니 부러울 뿐이다.


불어에서 하늘색은 '하늘(ciel)'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갖다 쓴다. 형용사는 성수 일치를 하지만 이렇게 빌려 쓰는 단어들에는 나름 예의를 지켜 성수 일치를 하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하늘색은 남성 명사가 오든, 여성명사가 오든, 복수명사가 오든 하늘이라는 단어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고고한 자태를 뽐낼 수 있는 것이다. 역시, 하늘이다!


흰색에 빛이 입혀진 게 은색이다. 은색은 빛의 성질을 띰으로써 훨씬 가볍다. 은색은 빛의 무게를 갖지 않은 가벼움으로 흰색의 무거움과 차별된다. 은색은 초승달, 수은, 달빛, 진주의 색이다. 달빛 받은 물결이 뿜어내는 게 은빛이다.

흰색이 순수성, 진리, 순진무구함의 표상이라면 은빛은 만질 수 없는 피안의 빛, 그 창백한 아름다움으로 고고하다.(p. 101)


흰색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으로 시작하는 식상한 주례사가 생각난다. 흰머리는 환영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은색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리처드 기어의 은발에서 비롯된 은색 머리카락에 대한 신비로움은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님의 은발에서 정점을 찍었다.


이제 슬슬 흰머리가 날 나이다. 양치할 때 살펴보니, 얼마 전부터 몇 가닥씩 보인다. 하지만 그리 싫지만은 않다. 흰머리가 아니라 은발이라고 세뇌한 탓이다. 드디어 나도 세월의 연륜이 차곡차곡 쌓이는 듯싶어, 괜스레 자랑스러워지기도 한다.


어릴 적 좋은 놀잇감이었던 색종이. 단면 색종이가 대세였던 그때, 양면 색종이라도 갖게 되면 만족도가 서너 곱절 높아졌다. 양면 색종이라 같은 색을 두 번 이상 만나볼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은색은 한 번 정도밖에 못 만났던 것 같다. 희소성 덕분에 은색 색종이는 금색과 함께 유독 아껴 썼더랬다. 종이학, 화갈, 별 1,000개를 정성스럽게 만들어 투명 유리병에 담아두면 은색 색종이로 접은 것들은 더욱 존재감이 빛났다.


그래서일까? 여름이면 빠뜨리지 않고 한두 번씩은 찾게 되는 큼직한 은색 링 귀걸이. 이 귀걸이를 할 때면, 타임캡슐이라도 탄 듯 20년 전, 리즈시절로 돌아간 듯싶다. 은색 링 이어링은 자신감 부스터다.


보라는 환멸과 동경이라는 양의성을 갖고 있다. 초록은 보라를 도무지 알 수 없다. 초록에 핏물이 들어야 보라가 될 수가 있다. 고통의 단련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보라. 보라는 삶을 알 만큼 아는 사람의 색, 사랑을 아는 자의 색이다. (p. 123)


금년 초 한 TV 방송에서 온 집안과 모든 소품을 보라색으로 칠한 '보라공주'라는 여성의 사례가 소개된 적이 있다. 보라에 대한 무한애정은 독일에서 살던 외롭던 유년시절, 어느 날 우연히 본 무지개 중 가장 밑단에 자리한 보라색에서 위안을 얻게 된 데서 비롯됐다고 했다. 보라색에 우선순위가 밀린 남편은 힘들다며 하소연했지만, 무지개 중 빨간색 대신 보라색을 선택한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온통 붉은빛으로 가득한 집. 상상만으로도 공포스럽다.


재작년 소묘를 1년 배우고, 작년에는 아크릴화를 배웠다. 코로나 19로 두어 달도 채 못 배워 아쉬움이 커서인지, 서로 다른 색상을 조합해 원하는 색을 만들어내던 초기 과정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빨강과 파랑을 비슷하게 섞었는데, 섞을 때마다 다른 느낌의 보라가 만들어지는 게 신기했다.


우리 감정도 이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걸까?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사람이, 비슷한 언행으로 나를 힘들게 하지만, 내 반응도, 내 감정도 미묘하게 결과 파장이 달라지며...


보라는 황제의 색이라고도 한다. 혹자는 만들기 어려운 까다로운 색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네로는 자신 외에 보라색 옷을 입은 자는 사형에 처했다고 하는데. 신라시대 골품제 신분제도 아래, 관료들은 자비청황 순으로 의복을 지급받았다. 붉은 기가 감도는 보라색인 자색은 가장 높은 관료가 독차지했다. 다음 순위 관료는 체리색 비색 옷을 입고, 청색은 다음 관료의 몫이었다. 마지막이 황색이다. 내일 출근할 때 보라색 옷을 한 번 입어볼까?




이 글을 처음 시작할 때는 호기롭게도 감히 <색채의 향연>이라는 제목을 차용했다. 쓰다 보니 너무 거창한 듯싶어, 추억팔이식 <색채 소풍>이라고 가볍게 바꿨다. 제목을 바꾸니 담긴 내용이 통통 가볍더라도 덜 부담스러워진다.


인생이라는 여정, 향연이라는 진중하고 무거운 단어 대신에 소풍이라는 설렘과 즐거움 가득한 단어로 채워봐야겠다. 물론 이 아름다운 색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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