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종종 봤던 가족오락관. 가장 기억에 남는 코너는 단연 <고요 속의 외침>이었다. 워낙 인기 있어서 최근 다른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재현했던 것 같다. 게임의 룰은 간단하다. 제시어를 입모양만으로 다음 주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운 좋게 첫 번째 주자가 제대로 알아듣더라도 마지막 멤버 순이 되면 외계어로 돌변해 버리곤 한다.
어젯밤 아이들이 가족 단톡방에 개설된 링크에 참여하라고 성화였다. 영문도 모르고 들어가 보니 제한된 시간 안에 앞사람의 그림을 재현해서 그림을 그리거나 그려진 그림을 보고 간단한 문장으로 설명을 하는 거다. 별 기대 안 하고 참여했는데, 게임이 끝난 후에 그림이 변형(?)되는 과정을 보다 보니 박장대소를 멈출 수 없다.
내리 몇 게임을 하다 보니 벌써 자정이 넘었다. 게임은 비슷해 보이면서 조금씩 룰이 달랐다. 조합은 다양했지만 그림이나 간단한 글로 표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네 명이 각자 간단한 상황을 제시하고 다음 주자가 이 상황을 그림으로 묘사한다. 다음 주자가 이어서 그림으로 묘사해 마지막 주자에게 넘긴다.
20세기 가족오락관 게임과 21세기 게임이 다른 점은 이 모든 과정이 앱에서 자동적으로 진행된다는 거다. 다음 주자가 정해지는 건 앱에서 랜덤으로 진행된다. 각 화면별 시청과 그림 그리기에 소요되는 시간제한도 자동적으로 이뤄진다. 화면 상단 모래시계가 비주얼화해서 시간 경과를 보여주고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면 경고음이 울린다.
내가 아이들에게 제시한 상황 중 하나는 <기타 치는 멋진 총각>이었다. 내 제시어를 받은 첫 번째 주자는 아들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아들이 나름 특징을 잘 잡아서 그럭저럭 그려냈다. 다음 주자는 큰 딸. 그림을 좋아하는지라 아들의 삐뚤빼뚤 그림만 보고도 제법 훈남을 그려냈다. 마지막 주자인 막내딸은 언니의 그림을 보고 어떤 상황인지 다시 글로 표현해야 했다.
딸이 선택한 문장은 <기타 포기한 0000>였다. 0000은 집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내 별명이다. 우리는 서로를 별명으로 부른다. 성을 2음절로 늘리고 이름을 웃기게 변형해서. 성이 <강>인 나는 <캉쿠>로, 성이 <박>인 아이들은 <박쿠>로 별명이 시작한다. 막내딸의 도발에 발끈해, 작년에 독학하다 중도 포기한 기타에 올해 말 재도전해보겠노라고 맘을 다잡아 본다.
그림으로 시작한 걸 그림으로 기억해 그려서 전달하는 건 난이도가 제법 높았다. 큰 아이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온 가족이 포커를 하는 그림을 그렸다. 언니 그림을 받은 막내딸은 포커를 하는 가족 사이에 1등이라는 글자를 크게 추가했다.
나는 포커카드를 성적표로, 화면 중간에 있었던 1등이 성적표에 적힌 숫자라고 잘못 이해했다. 그림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사람 머리만 네 개 등장하고, 두 사람은 1등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있는 것처럼 대충 그렸다. 추상화 수준의내 그림을 받아 든 아들은 나보다 한 술 더 떴다. 사람은 둘만 그리고 곱하기 2를 숫자로 표현하면서.
한참 실컷 웃은 뒤, 흥분이 채 가시기 전에 월요일을 준비하기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막내딸과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2년 전 가족 마니또 놀이로 화제가 옮겨졌다. 회사에서 한 달 동안 마니또를 하다 보니 너무 좋아서 가족에게도 제안을 했더랬다. 한 달 동안 자신의 마니또에게 선행을 베풀다 크리스마스에 2만 원 이내의 선물을 주는 것이었다.
서로의 마니또가 누구였는지,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둘 다 기억나지 않는 대목이 있었다. 답답했다. 당시에 소중한 추억이었는데, 이렇게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지다니. 기록하지 않으면 가족이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이 그저 한순간 이벤트로만 격하되어 버린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자 맘이 급해졌다. 기억력 저하만 탓하지 말고 소소한 교감과 즐거운 시간은 조금씩이라도 기록하기로 했다.
글을 발행하려고 하니 살짝 망설여진다. 권리에 유독 민감한 세 아이들이 자신들 허락도 안 받고 본인들이 그린 그림을 그렸다고 화를 내면서 그림을 내리라고 하면 어떡하지? 세 아이 중 브런치 유일 독자인 큰 딸에게 용돈이라도 좀 얹어주면서 동생들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딜이라도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