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앞두면 우리 집엔 비장한 전운이 감돈다. 아직 철부지 아이들이라도 이냥 저냥 대충 흘러 보낸 올해와 달리 내년은 새로운 마음으로, 빛나게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엄마 말을 곧잘 따르던 3~4년 전에는 우리 집 십계명을 정할 때 무척 즐거웠다.
각자 가족에게 바라는 최소 룰을 몇 개 정하고 10개에 맞춰서 무리한 규칙은 삭제하는 과정을 몇 번 되풀이하다 보면 서로가 그럭저럭 만족할만한 십계명이 정해지곤 했다. 하지만 매년 정했던 룰은 만들 때만 신나서 정할 뿐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되곤 했다.
지키지 않으면 벌칙이 따르지만, 서로 지키지 않고 통 크게 서로의 벌칙을 면제해주는 아량을 베푸는 까닭이다. 상황은 꽤나 다르지만, 서로 자백하지 않으면 무죄로 풀려날 수 있지만, 서로를 믿지 못해 자백해버려 유죄가 되어버리는 <죄수의 딜레마>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상호 합의한 원칙을 일관성 있게 적용하면 다들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을 텐데, 다 함께 무너져서 고 자리를 맴도는...
올해는 거창하게 10개 대신 간결하게 딱 3개만 정하기로 했다.
2022 박쿠 & 캉쿠 패밀리 3계명
1. 건강관리에 신경 쓴다
2. 자기 앞가림을 스스로 한다
3. 서로 아껴준다
건강을 위해 매일 술 마시는 남편에게 주 4회 이하로 줄여주기를 부탁했다. 남편이 소중하게 여겨지니 알콜중독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시아버지 뒤를 따를까 싶어 걱정이 많이 된다. 남편이 따를지 여부는 미지수다.
한참 이쁠 나이 큰 딸에게는 내 PT 수업을 양보했다. 겨울방학 동안 근력을 키워 몸도, 뇌도 아름다운 여인으로 거듭나 매력적인 이들과 교류하며 청춘의 특권을 누리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두 번째 룰은 고3이 되는 아들을 염두에 두고 정한 거다. 대학을 진학하면 졸업할 때까지는 뒷바라지를 해주지만, 진로를 정하지 못하면 스무 살이 되면 독립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아들과 워낙 끈끈하기에 내 말은 <헛된 위협 empty threat>에 불과할 때가 많다. 이 원칙은 아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관용을 베풀지 않기 위해 나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기도 하다.
마지막 원칙은 나를 위한 거다. 10대 3인방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고민 가득하던 3년 전, <부모혁명>이라는 책을 쓰면서 자녀양육 관련 나름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좀 더 나은 직장인으로 거듭나고 싶어서 후배들과 의기투합해서 익명으로 낸 두 번째 책을 통해 직장생활이 더 즐거워졌고 내 일에 대한 자신감과 애정이 커졌다. 지금 준비 중인 세 번째 책은 부부관계에 대한 거다.
<투덜이 아내>에서 <응원군 아내>로 달라지기. 나처럼 일찍 은퇴를 맞이한 낙엽족 남편과 사는 워킹맘 아내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물론 첫번째 독자는 내 자신이다. 늘 힘들었던 남편과의 관계에서 지혜로운 해결책을 찾고 싶어서 나를 모르모트 삼아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다.
세 번째 룰을 이행하는 차원에서 새해 첫날을 <YES DAY>로 정하고, 가족이 원하는 것에 대해 무조건 "YES"로 답하기로 했다. 영화 <예스 맨>의 주인공처럼 살아보는 거다.
최근 웹툰 작가가 꿈인 막내를 위해 거금을 들여 아이패드 프로를 사줬다. 이 글 대문사진은 어제 도착한 아이패드로 그린 막내의 첫 작품이다. 대충 그린 거라 공유하기 부끄럽다는 막내에게 공부 1시간을 면제해주고 맞바꾼 그림이다. YES DAY라 가능했던 딜이었다.
할머니, 외할머니, 큰엄마께 새해 안부인사 드리자는 내 제안에도 평소 같으면 내켜하지 않았을 막내와 아들도 오늘만큼은 YES다. 물론 나도 반대급부로 새뱃돈에 상응하는 소정의 용돈을 계좌 이체해줬다.
새해 첫날을 새벽까지 술 마시며 맞이하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려다 오늘이 YES DAY란게 떠오른다. 오늘 밤 하루만은 제발 마시지 말라고 부탁했고, 마시면 벌금 20만 원을 내기로 합의했다. 아이들에게도 잘 감시(?)하라고 미션을 주고, 혹시 아빠의 일탈행위가 발각되면 1/N로 벌금을 나누기로 했다. 시끄러운 말다툼으로 끝나곤 했던 남편의 음주가 쿨한 이벤트로 변신했다.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난 남편이 아들에게 어깨를 주물러 달라고 요청한다. 평소 같으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거부했을 아들. YES DAY라서 박력 넘치는 안마로 대응한다. 앉아서 차분히 주물러달라는 2차 요청에도 순순히 응한다.
이번엔 아들 차례다.농구하러 나가자고 졸라댄다. 나에게 선택권은 없다. YES!를 외친 후, 집 밖을 나섰다. 다행히 넘어지진 않고 볼보이 수준의 깍두기마냥 참여하는 걸로 마쳤다.
YES DAY 덕분에 평소보다 더 크게 웃고, 좀 더 끈끈해진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자주는 못하겠다. 프로 엄마, 완벽한 아내 코스프레하느라 삭신이 쑤시는 걸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