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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Jan 01. 2022

팔짱 낄 용기

낄까? 말까?


망설이는 1분여 사이 차 앞에 벌써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주차장에서 차가 있는 곳까지 팔짱을 끼고 싶다는 마음과 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싸워댔다.


남편과 사이좋게 지내는 건 이번 생은 망했다며 '이생망' 팔자를 원망해왔다. 하지만 머리를 다친 후, 남편의 소중함을 문득 깨달았다. 다쳤을 때 뒷수습을 해주고 응급실까지 바래다주고 상처부위를 자주 들여다보며 상태를 체크해줬던 건 내가 아끼던 세 아이들이 아니라 매일 구박했던 남편이었다.


문득 희망을 갖고 싶어졌다. 내 마음만 바꾸면 나도 금슬 좋은 부부로 재탄생할 수 있는 거 아닐까? 남편은 사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는데,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동안 남편을 홀대했던 건 아니었을까?




눈이 오거나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가장 먼저 걱정하는 건 출퇴근 방식이다. 회사가 가까워 평소에는 도보로 다니지만, 길이 미끄러울 때는 자신이 없다. 넘어지는 게 연례행사이기 때문이다. 작년 초에도 회사 바로 앞에서 뒤로 꽈당 넘어져 경비 보시던 분이 당황해하셨더랬다.


이럴 때 구원투수로 등장하는 건 늘 남편이다. 살얼음이 낀 날에는 등산화에 버금가는 운동화를 신고 제아무리 다리에 힘 바짝 주더라도 넘어질까 봐 겁이 나서 엉금엉금 걷게 된다. 운동 겸 걸어가겠노라고 큰소리치고 나섰다가 몇 발자국 걸어보니 도저히 자신이 없어 남편에게 라이드를 부탁했다.


선뜻 응해준 남편이 고맙기도 하고, <션-정혜영>씨 부부처럼 이번 생에 사이좋은 부부로 살아보고 싶다는 꿈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던 차였기에 팔짱을 끼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던 거다. 하지만 한편으론, 남편에게만은 평소에 무뚝뚝한 모드를 고집하던 내 행태를 갑자기 바꾸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가득했다. <냉정이 자아>가 <싹싹이 자아>를 손쉽게 이겨버리고 팔짱을 끼지 못한 채 2021년 마지막 날 아침 출근길을 연출했다.




눈이 펑펑 내리던 저녁, 아들과 큰 딸이 두 손으로 다 품을 수도 없을 만큼 큰 눈사람을 만들었다. 사진 속 눈사람이다. 눈코 입과 팔이 없다. 문득 남편에게 비친 내 모습이 이 눈사람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웃음 보내고, 부드러운 말을 건넨 기억이 흐릿하다. 내가 먼저 다가가 남편을 다독여주고 껴안아줬던 적도 그리 많지 않다.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는 나름 유쾌하고 즐거운 엄마라고 자평한다. 회사를 비롯해 밖에서 알게 된 이들에게도 가능한 상냥하고 따뜻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유독 남편에게만은

찬기운 세제곱 풍기는 눈사람 같은 아내였다.




<살가운 아내>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머리를 다치고 집에서 쉴 때는 먼저 다가가 남편 <궁디 팡팡>도 해줬더랬다. 남편이 잘 보살펴주는 데 대한 답례이기도 했지만,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심적, 신체적 스트레스가 거의 없어 남편에게 불필요하게 날세울 필요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출근하고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 반복되니 <냉랭한 아내>로 되돌아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새벽까지 보고서를 작성하며 집에서도 일을 놓지 못하게 되니 피로가 쌓였다. 아침에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전날 과음하고 아이들 아침 식사도 안 챙기고 신나게 단잠에 빠져 있는 남편을 보면 화가 났다.  


남편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을 바꿔보려고 핸드폰 남편 번호에 <드림 헬퍼>라는 수식어까지 넣어서 저장해뒀지만 다 부질없었다. 하지만, 2021년을 이렇게 아무런 진전 없이 끝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젯밤 팔짱 낄 용기를 내는 대신, 팔짱을 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무인대출 책을 빌리러 가는 딸을 동행하며 온 가족이 저녁 산책 길에 나섰다. 길이 미끄러우니 남편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평소에는 딸과 팔짱 끼고 걷곤 했는데, <연애모드 뿜뿜한 부부> 연출하기 미션을 클리어해야 하니 딸은 홀로 걷게 하고 남편에게 다가갔다.


남편이 팔짱 끼라며 팔에 공간을 만들어주고, 내가 흔쾌히 팔짱 끼는 낯선 모습에 큰 딸이 흠칫 놀란다. 엄마와 아빠도 이렇게 팔짱 끼며 다정하게 걸어가던 시절이 있었다며 기분 좋게 웃었다. 팔짱 끼기가 디폴트 조건이 되는 상황에 놓이니 불필요한 감정 소모할 필요가 없다. 나와 남편의 자존감을 모두 지키는 윈윈 전략, 제법 괜찮았다.


마침 딸이 빌린 건, 죽어버린 연애세포마저 재생시킬 것 같은 <백설마녀의 지금 당장 연애>라는 책이다. 2021년을 <화기애애한 부부>로 마무리했으니, 2022년 적당한 긴장감을 자아내며 남편과 연애하는 기분으로 <화기애매한 부부>로 시작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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