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오늘 뭘 입지?"라며 옷을 고른다. 늘 입는 반팔에 반바지 말고 다른 옷을 입는 건가? 오랜만에 긴 팔 상의와 긴바지 교복을 주섬주섬 입는다. 이유를 물어보니 선생님이 한 말씀하셨다는 거다. 보는 사람도 좀 생각해달라고.
여름 끝자락 후, 추석이 지나면 갑자기 남자 동료분들이 멋지게 보이곤 한다. 반팔 대신 긴소매 와이셔츠에 재킷까지 걸치기 때문이다. 입는 옷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평범해 보이던 분들이 훈남으로 변신하는 기적이 오늘 아침, 내 아들에게도 일어났다. 늘 추레한 반팔로 등교하던 아들이 긴 옷으로 바꿔 입으니 내 눈에는 꽤나 멋져 보인다.
내년에 고3이 되는 아들은 긴 바지를 거의 입지 않는다. 상의도 늘 반팔이다. 등골 브레이커 패딩을 사줬지만 입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자전거를 탈 때 불편하다는 게 이유다. 긴바지를 입으면 체인 쪽에 바지가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바지 아랫단이 찢어진다는 거다. 몇 년째 계속되는 실랑이에 지쳐 나는 더 이상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는다.
반팔을 고수하는 아들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십수 년 전 함께 일했던 한 남자동료분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분은 10대 시절 몸에 열이 많아 한겨울에도 늘 반팔을 입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들은 그리 열이 많아 보이지도 않는다. 춥게 입는 탓에 늘 감기를 끼고 살고, 걸핏하면 병원행이다.
아직 철이 덜 든 사내아이의 허세인지, 진짜 불편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아이가 마음대로 입을 자유를 허락한 후, 나와는 더 이상 이걸 주제로 불필요한 신경전을 벌이지 않는다. 나와 달리 아직 아들의 옷차림을 포기하지 못한 남편은, 볼 때마다 한 마디씩 잔소리를 해서 본전도 못 찾곤 한다.
반바지 입지 말라는 게, '치마 짧으니까 안돼'라는 거랑 뭐가 다르지?
마지못해 긴바지를 입으면서도 아들이 한 마디 남긴다. 치마 길이를 단속하는 걸 고루하다고 생각해왔다. 헤어스타일 규제도 마찬가지다. 획일적인 규율 아래 "다움"을 강요하는 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자 갑질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궤변 같은 아들의 말에 곧잘 설득당하곤 한다. 출근길에 아들의 말을 곱씹게 됐다. 타인과 함께 사는 공간에서는 타인의 시선에도 어느 정도 맞춰줄 필요가 있다고 말을 했지만, 아들이 납득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 역시 내 설명이 충분치 않다고 여겼으니.
학교라는 장소에서 생활할 때는 그곳에서 통용되는 규범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덧붙였다. 아들은 학칙에는 반바지를 입지 말라는 규정이 없다고 했다. 말문이 막혔다. 오늘도 의문의 1패를 당했다.
작년 10월, 옆 부서에서 불공정 관행 혁신 차원에서 여학생에게 치마 교복을 강제하는 제도를 개선했다. 교복 선택항목에 바지를 추가한 거다. 한 일간지에서 남학생에게 치마 교복 선택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택권을 준다고 치마를 선택할 남학생이 있을지, 치마를 입고 등교한 남학생을 따뜻한 시선으로 포용할 만큼 학교가 성숙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아들이 오랜만에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고 가니 엄마 된 입장에서 기분은 좋았다. 부모 말은 그렇게 안 듣다 선생님의 한 마디에 바로 순응하는 걸 보며, 권위의 힘도 새삼 느꼈다. 아들이 자유를 구속당한다는 억울한 느낌은 갖지 않고, 지금처럼 한겨울에는 콧물 안 나올 정도로 입고 다니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