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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Feb 07. 2022

스불재 인생

스불재
스스로 불러온 재앙!


정신없이 1월의 한가운데를 스트레스로 가득 차 보내는 날 보고 큰 딸이 한 마디 했다. "스불재!" 나처럼 사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란다. 의욕적으로 잔뜩 벌려놓지만, 능력의 한계를 느끼며 '스스로 불러온 재앙' 앞에서 한숨을 쉬어대곤 하는 이들에게 들어맞는 단어다.


힘든 일상을 나 홀로 자초한 건 아니었다. 불가항력으로 해야만 하는 회사 일도 만만치 않았다. 큰 행사를 개최해야 한다고 해서 정신없이 준비하느라 열흘 정도를 훌쩍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행사는 무산되었지만, 중요한 자료집과 계획을 수립하는 숙제가 남아 한동안 분주했다.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영상 촬영에 응해달라는 사내 부탁에 덥석 응했다가 사전 준비를 한다고 마음을 쓰게 됐다. 익명으로 낸 두 번째 책이 출간되면서 마스크로 얼굴의 80%를 가리고 공중파 방송에도 아주 잠깐 출연했다.




내가 벌려놓은 일들을 되새겨봤다. 일본어 스터디를 시작했다. 일본에 사는 한국분과 보이스톡으로 주 1회 한 시간씩. 이 분은 현지인 수준으로 일본어를 구사하는 분이지만, 내 실력이 프리토킹을 할 정도가 되지 못해 쉬운 회화책으로 진행했다. 딱 2번 했을 뿐인데 신경이 무척 쓰였다.


세 번째 스터디를 하루 앞두고 스터디 버디분이 확진 판정을 받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했다. 무척 슬픈 일인데, 입술이 귀 옆에 걸렸다. 스터디를 새로 만들면 너무 좋은데, 스터디가 무산되면 더욱 좋은,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불일 스터디도 시작했다. 매일 영어, 불어, 일어 스터디 인증을 하는 온라인 버디 분과 주 2회 불어와 일어 스터디를 시작했다. 마침 집에 있던 여행 일본어, 여행 프랑스어 책 속 문장이 거의 같길래, 이 책을 기본으로 스터디를 하자고 제안했다. 결론적으로 일어 스터디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


여행 외국어라 문장이 매우 간단한데도, 외운 문장을 복기하는 건 만만치 않았다. 나이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꼈다. 스터디 버디분이 나보다 10살 이상 어린 분이셔서인지, 나보다 더 적은 시간을 투자하고도, 나보다 더 잘 암기하셨다.


타인과 비교가 불행의 출발점이란 걸 머리로는 잘 알면서도, 이상하게 스터디가 끝나면 늘 마음이 불편했다. 버디님만큼 좀 더 잘 외우려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데 그 정도로 큰 시간을 내고 싶진 않고, 결실은 투입 이상을 얻고 싶은 이 심보는...




토요일마다 다니는 3시간짜리 불어 학원도 고충을 가중시켰다. 이동시간 왕복 3시간. 토요일은 새벽부터 내리 4시간 남짓 숙제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 DELF A2 시험이 3월이라 학습 분량을 고도화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쏟아지는 새로운 어휘와 여전히 웅웅 거리는 잡음처럼 들리는 청해 파트는 늘 좌절을 안겼다.


매 수업시간마다 즉석 시험과 말하기, 쓰기 테스트가 있어서 실력이 고대로 드러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날 포함해 수강생이 다섯 명인데, 세 명이 불어 전공 대학생이다. 다른 한 명은 나보다 17세 젊으신 회사 후배님이다. 고참 선배지만 불어는 새내기 수준인지라, 수업시간마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다.


작년 말 사고 이후에 소중한 인연들과 만남을 유예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도 일상을 더욱 숨 가쁘게 했다. 캐나다에서 함께 박사과정을 밟으며 선의의 경쟁을 펼쳤던 분을 만나러 딸 둘을 데리고 왕복 6시간 거리를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석사 동기와도 5년 만에 잠깐 만나 근황을 나눴다. 10여 년 전 직장생활을 함께 해 자매처럼 지내는 동료분들과도 만남을 이어갔다.




평소와 약간 결이 다른 바쁜 일상 탓에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쓰기와 읽기'가 실종되어 버린 한 달이었다. 블로그에도 브런치에도 단 한 편의 글을 쓰지 못했다. 읽기는 조금씩 시늉을 냈지만, 보다 적극적인 뇌 활동이 필요한 쓰기를 위한 의욕과 시간은 좀처럼 내기 어려웠다.


세 번째 책 집필을 시작만 하고 멈춰버린 지 한 달. '작가'라는 타이틀을 평생 업으로 삼고 싶다면서, 이에 걸맞은 노력은 등한했던 내게 최근 신선한 충격이 세 차례 찾아왔다. 첫 번째는 지난주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서점에서 읽었던 <린치핀>에서 만난 세스 고딘의 문장이었다.


"모든 걸작은 완벽한 마무리를 통해 탄생한다. 나는 책을 100권 이상 만들어냈다. 물론 모든 책이 잘 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책들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을 쓸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피카소는 1,000점 이상의 그림을 그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피카소의 그림을 세 개 이상 알고 있는 것이다.(p. 203)"


카토 시게아키


두 번째 충격을 안긴 이다. 일본 쟈니스 소속 NEWS라는 아이돌 그룹 중 한 명이다. 글 쓰고 책 읽을 시간은 없다면서 스트레스를 푼다는 핑계로 동영상을 볼 시간은 있었던 일요일 오후, 넷플릭스에 올라온 다큐멘터리를 보며 알게 된 이다.


카토상은 본업인 가수뿐 아니라 소설가와 각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콘서트 리허설을 앞두고 잠깐 가진 여유시간에 자신의 소설을 이어 써나가던 모습이 강력하게 뇌리에 박혔다. 절대로 잊고 싶지 않아서 이 글의 대문사진으로 저장해뒀다.


이른 아침에 동생이 보내준 카톡이 충격 3 연타의 마침표를 찍었다. 한국의 사위로 알려진 메릴랜드 주지사의 아내분, 유미 호건님이 나와 같은 고향분이셨다. 미국으로 건너가 이혼 후, 딸 셋을 홀로 키워내고 화가로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분이다. 찾아보니 <우리가 서로에게 선물이 된다면>이라는 책도 내셨다. 가슴속에서 한 달 남짓 명맥만 유지해오던 불씨가 불잉걸이 되어 다시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돌이켜보니 내가 아등바등 치열하게 살던 이면에는, 나 스스로 내 삶에 자신감을 갖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좀 더 욕심 내면, 내 모습을 통해 긍정적인 자극을 받는 분이 계시면 좋겠다는 속마음도 있었다.  내 삶의 형태를 응원해주는 분들은, 내가 지치지 않고 전진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작가라면 쓰던 글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세 번째 책 집필을, 늦추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재개해야겠다. 그동안 쉴 시간이 있다면, 글 쓸 시간도 충분했던 거다. 무의미한 웹서핑 등으로 인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던 시간에 이제는 좀 더 인색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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