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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Feb 12. 2022

빨간 내복

한국사 능력검정시험을 치르고 난 큰 아이가 큼지막한 소포 상자를 품에 안고 집에 들어온다. 요즘 연이어 옷을 사더니 또 새 옷을 한 벌 샀나 보다. 공부가 부족해 시험을 만족스럽게 치르지 못했다는 딸의 문자를 받은 직후라 해맑게 웃는 딸이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철딱서니 없게만 보인다.

 

서늘한 내 눈초리를 읽었는지 박스를 들고 동생 방으로 향한다. 맘 편하게 여동생 방에서 옷을 입어보려나보다. 딸에 대한 비판의 마음이 커질세라 부랴부랴 내 관심을 불어공부로 돌려본다. 1시간 후에 프랑세즈 알리앙스 수업이 있다. 선생님과 나이가 비슷해서인지 늘 1번 주자로 말하기를 해야 해서 수업 전에는 긴장상태로 불어공부에 전념하게 된다.

 



조금 후에 딸이 배시시 웃으며 손에 아담한 케이스를 들고 내 방 문을 빼꼼히 연다. 의아해하는 내게 손에 든 걸 건넨다. 설마?


딸은 3주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5인 가족 중 드디어 나 말고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이가 생긴 거다. 첫 급여를 받으면 부모님께 빨간 내복을 사드리는 게 예전 전통이라는 걸 말했던 걸 기억한 딸이 첫 알바비를 받자마자 날 위한 선물을 준비한 거다.




내복 한 벌 받았을 뿐인데, 딸에 대한 내 인식이 갑자기 바뀌는 게 느껴진다. 공부 부족으로 한능검 시험을 망친 철없는 딸에서 고군분투하는 엄마에 대한 배려심과 효심이 깊은 딸로. 조금 전까지 가졌던 원망의 마음이 스르르 녹고, 딸이 대견해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딸의 선물을 무조건 반색했던 건 아니다. 내복을 입지 않기에, '왜 묻지도 않고 샀냐'부터 시작해 훈계를 이어갔다. 다음에 '진짜' 직장을 잡게 되어 첫 월급을 받게 되면 꼭 미리 원하는 걸 묻고 내가 원하는 선물을 사달라고 잔소리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냥 쿨하게 '고마워'라고 한 마디만 하면 충분했을 텐데. 20년 차 엄마임에도 현명한 프로 엄마 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무브 투 헤븐>이라는 드라마에는 아들이 첫 월급으로 사 준 빨간 내복을 박스조차 뜯지 않고 수십 년 후 죽을 때까지 아끼고 아끼던 한 엄마의 사연이 등장한다. 비슷한 경험이 내게도 있다. 고등학생 시절, 아버지 생신 선물로 펜 하나를 사드렸다. 아버지는 싸구려 펜에 불과한데도 딸의 선물이라고 절대 쓰지 않고 아끼셨다. 십여 년 후에 보니 펜이 나오지 않아 속상했다.


자녀의 마음을 아끼는 것은 물론 아름다운 부모의 모습이다. 하지만 자녀 입장에선, 마음이 담긴 선물의 가치를 제대로 활용하는 게 더 기분 좋은 일이다. 불어 수업이 끝나 귀가한 후에 빨간 내복을 바로 입으려다 생각해보니 조금 후에 있을 영어 스터디는 화상으로 하기에 내복 차림으로 있을 수 없다.




영어 스터디가 끝나자마자 레이스 화려한 내복을 입어본다. 낼모레 쉰이라는 나이를 정직하게 보여주는 아랫배가 눈에 거슬리지만 내 눈에는 핏이 딱 맞는다. 자신감을 갖고 아들에게 자랑하니, 얼마 전 올림픽에서 본 피겨스케이트 20위권 정도 하는 선수가 입을 것 같은 옷이라고 냉소적인 코멘트를 날린다. 역시 아들답다.


막내딸에게 보여주니 자줏빛 내복을 샀는데 왜 색이 그렇게 이상하냐며 핀잔을 준다. 큰 딸은 한 사이즈 큰 걸 샀어야 했다며 뒤늦은 후회를 한다. 내복을 누가 오버핏으로 입는단 말인가. 내복이 좀 타이트하다면 까짓 껏 이참에 내복에 맞춰 내 몸 사이즈를 살짝 줄이면 되지.




색과 레이스가 적당히 화려하고 착용감도 좋아서 나는 꽤 만족스러운데 꽉 끼는 상하의 내복 차림으로 있으니 온 가족이 민망해한다. 어쩔 수 없이 위에 홈드레스 잠옷을 껴입었다. 생각해보니 내복은 다른 이에게 보여주는 옷이 아니었다. 내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건 어린이들의 특권이니.


문득 영화 <돈 룩업>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모습은 사람마다 천양지차였다. 각 개인의 서로 다른 인생관과 삶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나라면? 딸이 사준 내복을 입고 가족과 평범하게 과거 추억을 곱씹다 맞이하고 싶다. 사이즈 90 내복에 맞는 몸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려면 부지런히 운동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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