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나다
2011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9월 26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큰 방황을 하던 시절 이 책 [몰입,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나다]을 만났다. 미하이 칙센트는 헝가리 출신의 심리학자이다. 이탈리아의 피우메(현재의 크로아티아 리예카)에서 태어났으며, 22살에 미국으로 이민했다. 현재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재직 중이다. 시카고 대학교 심리학과와 레이크 포레스트 칼리지의 인류학과 학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1965년에 시카고 대학교에서 Ph.D를 수여받았다. 40년 동안 교수로 재직한 후 현재 피터 드러커 경영대학 교수 및 '삶의 질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처음 이 책을 만나고 삶의 한줄기 희망을 발견한 것 같았다. 책을 읽고, 요약하고, 나중에는 필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읽고 또 읽었다. 이 책은 나에게 행복에 대한 바이블과도 같은 책이다. 나는 성경을 읽듯 그렇게 이 책을 대하고 또 마음에 담았다. 이 책의 서론 부분에서 다루는 주제는 존재론적 불안 혹 실존적 공허라고 불리는 상태이다. 우리는 청년기에서 장년기로 진입하면서 드는 삶의 의문 ‘이게 정말 내가 꿈꾸던 인생의 전부란 말인가?’라는 불안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청년기의 꿈과 희망은 뒤로하고 어느 날 거울 앞에 선 자신을 직시하면서 불안감은 엄습했다. 이번 생에서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는 자괴감에 빠지는 건 뒤로하더라도, 늘어가는 흰머리와 툭 튀어나온 배, 불어난 체중, 침침해진 눈 등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아직 날개를 펴 보지도 못한 나의 인생이 이제 하강국면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정말 견딜 수 없는 배신감과 극도의 피로감에 시달렸다.
나는 대부분의 학창 시절을 모범적인 학생으로 살아왔다. 특히, 그 모범적인 학창생활의 끝판왕은 대학생활이었다. 학부의 모든 수업에 빠진 적이 없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 흔한 지각 한번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모범은 곧 타인의 귀감이 될 거라는 생각에 한편 뿌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부 생활이 끝나갈 4학년 1학기가 되었을 때 나는 대학 생활이 강의와 공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걸 알게 되었다. 수업 시간이 줄어들고, 더 이상 열심히 참석해야 할 강의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생활의 낭만은 둘째 치고, 주변을 되돌아볼 시간 없이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며 공부하는 이상한 학생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그 흔한 지각 한번, 결석 한번 없이 살아온 시간들을 후회하며 마지막 4학년 대학생활의 자유를 만끽했다.
그 후 직장생활을 시작하기까지 나는 어른들이 사회가 기대하는 삶을 충실히 살았다. 좋은 학교, 좋은 성적, 좋은 회사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느라 청년기를 정말 한눈팔지 않고 살아왔다. 그리고 30대가 되어서는 인생을 본격적으로 더 잘 살아보려 노력했다. 가정을 이뤘고, 분유값, 기저귀 값 벌어야 하는 가장의 어깨는 정말 무거웠다. 아직 더 성공해야 하는데, 좋은 차도 사고, 강남에 집도 옮겨야 하고, 돈도 조금 더 벌어야 하는데 등등. 근데, 그즈음이 되어서야 이것은 아니지 않은가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노자, 니체, 프로이트 등을 비롯한 근현대 사상가(노자는 고대 사상가지만, 이들과 맥을 함께한다.)들의 저작을 공부하면서 이념과 체계는 사람들의 욕망을 억압한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공교육의 목적은 사회에 정상적으로 적응 가능한 수준의 기능과 기술을 익히게 하는 데 있다. 나의 사례에서처럼 사회가 주는 보상과 처벌에 잘 순응하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그 목표이다. 사회화가 잘 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 보상을 받고 만족하는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이 좋다고 하는 것을 그토록 최선을 다해 이루려 노력하고 사는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 칙센트 미하이 교수가 제안하는 것은 사회가 제공하는 보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이를 위해서 어떻게 사회적 보상들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보상으로 대체하는 가를 배우는 방법에 대한 이해이다. 사회에서 원하는 일들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일들 이외에 우리 스스로의 목표를 만들기를 제안한다. 나아가 만약 사람이 경험의 흐름으로 주어지는 의미를 발견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사회적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이것을 통해 그동안 사회에 맡겨 두었던 자기 스스로의 힘을 다시 찾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미하이 교수도 여느 현대 사상가들의 견해처럼 마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고 얘기한다. 외부의 힘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최근에 독서했던 그리스의 델피 신전에 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한 인생의 탁월함(arête)은 단순한 지적인 앎을 넘어 구체적인 삶을 탁월함으로 이끌 수 있는 방법론이었다. 이런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실천을 통해 얻어지는 것들이다.
우리가 진정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외부의 상황이나 어려움을 이겨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의식과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고, 감정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냥 떠오르는 의식적 무의식적 생각들은 잡념일 뿐이다. 이유 없이 우울하거나 기쁜 감정도 역기능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주변의 정보와 현상들을 순서화한 후 의도적으로 집중할 필요가 있다. 경험은 분산되어 있는 에너지를 어떻게 집중하느냐 따라 질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의 인식 속으로 들어온 정보가 우리의 목표들과 일치하게 되면 심리적 에너지가 무리 없이 작용한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외적 조건들이 우리 삶의 목적에 더욱 잘 부합하도록 우리가 경험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의식이 질서 있게 구성되고 또한 자아를 방어해야 하는 외적 위협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주의가 목표만을 위해 자유롭게 사용될 때를 최적 경험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바로 플루우(flow) 경험이라고 이름 붙였다. ‘마치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날아가는 느낌’ 또는 ‘물 흐르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라는 뜻인데, 플로우 상태를 경험하는 사람은 심리적 에너지가 자신이 선택한 성공적 수행을 위해서 대부분 사용되기 때문에 더 강하고 자신에 찬 자아를 형성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주 몰입(flow)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의식을 조절하면 삶은 저절로 향상되게 된다고 주장한다.
칙센트 미하이 교수가 제안하는 즐거움의 구성 요소를 소개할까 한다. 그는 사람들이 가장 긍정적인 경험(몰입-flow)을 할 때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에 대해 아래 8가지를 말한다.
첫째, 행복한 경험은 일반적으로 본인이 완성시킬 가능성이 있는 과제 직면했을 때 일어난다.
둘째, 본인이 하고 있는 행위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수행하는 과제에 명확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넷째,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일상에 대한 걱정이나 좌절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고도 깊은 몰입 상태로 행동할 때이다.
여섯째, 즐거운 경험은 사람들에게 본인의 행동에 대한 통제감을 느끼도록 해 준다.
일곱째, 자아에 대한 의식이 사라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플로우 경험이 일어나면 자아감이 더욱 강해진다.
여덟째, 시간의 개념이 왜곡된다. 즉 몇 시간이 몇 분인 것처럼 느껴지고, 몇 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모든 요소들의 결합이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은 너무나 충분한 느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위해 많은 정력을 쏟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하고 있는 독서에 이 플로우의 경험을 대입해 보면 대략 이러하다. 독서는 완독이라는 것을 목표로 시작된다. 그리고 고도의 주의 집중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완독 혹은 요약 등의 목표가 없이는 지속하기 힘들다. 개인적인 목표나 깨달음이 없이 독서하는 것은 매우 지루한 일이다. 그리고 독서를 하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주인공이 되어보기도 하고, 저자가 되어 보기도 한다. 이것은 일종의 통제감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순간 높은 수준의 관조나 의식적 무의식적 고찰을 하며 자아에 대한 의식을 잊게 된다. 그리고 시간의 망각까지 경험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독서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독서를 하는 주체의 문장 해석 능력, 감정 이입 능력, 비판적 글 읽기 능력에 따라 몰입감은 차이 날 수 있다.
삶을 정말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것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내가 10년 이상을 테니스를 치는 이유는 같은 규칙이지만 늘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경기의 매력 때문이다. 어느 날은 컨디션도 좋고 파트너와 합도 잘 맞지만, 어떤 날은 정말 엉망진창인 경기력을 보인다. 하지만 게임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큰 틀 안에서 내가 더 변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독서에 열을 올리는 것도 나와 다른 관점, 나를 넘어서는 생각에 대한 경외심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큰 즐거움을 느낀다. 되돌아보면 늘 이런 좋은 경험 이후에 나는 스스로 변화했고, 그때마다 내 자아는 좀 더 성장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갑자기 현타가 온다. 10년 전 이 책을 만나서, 경전처럼 읽고 읽었다는 나는 정말 좀 더 행복해졌는가? 저자가 말한 대로 ‘이것이 네 인생을 바칠 만큼 가치 있는 목적이다’라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만 알뿐 나는 아직도 시행착오 속에 있는 나약한 인간이지 않은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델피 신전의 유명한 문구처럼 나는 아직도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내가 결코 주어진 삶의 조건에 맞춰 살아야 하는 당위의 존재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은 나의 자아를 내려놓는다는 전제를 하고 보면 매우 단순하고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조건에 매여 있어야만 한다면, 그래서 내가 나로 존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참을 수 없고 나도 더 이상 존재할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 작지만 그래도 때론 꿈틀 하는 나의 고유한 것으로 존재해 보고 싶다. 외부의 의무와 당연히 아닌 내가 원하는 행위, 나만이 고유한 그 행위를 한번이라도 해보고 죽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무의미한 일을 의미 있게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통제력을 갖기 위해서는 단호한 결단과 훈련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는 내 삶이라는 말의 고삐를 잡은 인생을 열망한다.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을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