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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Oct 11. 2021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알랭드 보통은 1969년 스위스 취리히 출신의 소설가, 철학가, 수필가이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고, 킹스칼리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마무리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국내 독자들로부터 인기가 높다.

 

지난봄 클럽하우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을 즈음 우연히 가입한 독서클럽에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함께 읽었다. 그때는 책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형식이어서 책을 꼼꼼히 읽어보기보다는 좀 더 직관적이고 관심이 가는 내용 위주로 대화했던 것 같다. 오늘 다시 펼쳐본 그의 책은 내가 읽었던 로맨스 소설이 아니라, 철학자의 사랑에 대한 서양철학사적 고찰에 가깝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작가가 한국 방문했을 때 했던 강연의 내용 중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가 사랑하기 힘든 두 가지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그중 첫 번째는 우리가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함 때문이다. 다음 이유는 우리가 남을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전반부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우연이라 생각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낭만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짝수 달에 자정 무렵 태어나고, 클라리넷을 분 적이 있고, 학창 시절 한여름 밤의 꿈을 공연에 참가한 적이 있으며, 어금니에 충치가 있고, 햇볕에 알레르기가 있는 등등이다. 서로가 운명적이라는 단서들은 가히 초월적 계시에 가깝다.


사랑의 비극은 이것을 열렬히 믿는 광신도가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자신도 타인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성급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큐피드의 화살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열정적 사랑의 호르몬이 그 역할을 다할 즈음 우리 영혼은 다시 맑은 눈을 되찾게 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앞에 절망하고 만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의 행복은 두 가지 종류의 과잉에 의해 제한된다. 하나는 질식이고, 하나는 외로움이다. 질식은 상대를 너무 잘 안다는 착각에서 오는 과잉이고, 외로움은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지 못할 때 오는 또 다른 과잉이다.


사랑에 대한 철학적 대립도 이와 같다. 철학적 이상주의 혹은 전통주의적 입장은 이상적이고 초월적인 것이 있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은 그것들의 잔상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적인 관념들은 초월 없이 이해하기 어렵고, 일생을 통해 깨달을 수 없는 이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성적 사랑을 정의하는 많은 이론과 규칙들은 우리를 숨 막히게 한다. 숨 막힘의 끝은 강제된 것이어서, 저항하든 노예가 되든 둘 중 하나이다. 전통주의의 반대는 사랑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하는 무엇인가라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변화하고 고정 불변한 것들이 없다는 생각은 자유롭지만 고독 그 자체이다. 그래서인가? 사랑의 종교 기독교에서는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온유한 것'이라 얘기하는지도 모르겠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분노하고, 변화하는 마음에 외로움은 점증한다.


사랑하는 과정에서 질식하지도, 과잉하지도 않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이 방법은 경계에 서는 것이라 생각한다. 낭만적인 사랑이든, 연민이나 소유든 타인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려거나,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타인에게 요구하는 많은 것들은 결국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존재가 타인을 자신의 분신 만들겠다는 허무맹랑한 욕망일 뿐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경계에 서서 저만치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일에 앞서,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고 극복하는 과정일 것이다. 타인과 공존하기 위해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찢기고 터진 나의 상처를 먼저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가 적합하니 않을까싶다. 그리고 저자의 얘기처럼 내가 왜 사랑받아야 되는가 묻는다면, 내가 ‘나’라는 사실 때문이고 싶다. 낭만적 기대, 연민, 가치관을 넘어서 나의 존재론적 지위로 인해 나는 사랑받고 싶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욕망에서 멈춰야 한다. 외부의 요인은 결국 나의 욕망과 언제나 어긋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얘기하고 싶지만, 타인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이나 타인에게 사랑을 받는 것 역시 결국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을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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