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받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최근 진행하는 신규 프로젝트 건의 투자유치를 고려 중이다. 사업의 초기 모델은 잘 안착한 편이고 그 모델을 확장하려면 자본의 레버리지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나는 꽤 오랜 시간 서성이고 고민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자본의 유치 이후에 감당해야 할 경영 간섭에 대한 부담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단지 경영 간섭에 대한 걱정 때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예상되는 수익과 수익 분배의 비율이 비교적 명확한 사업이기 때문에 투자 이익 측면에서 문제가 될만한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면 나는 왜 이 투자에 대한 이런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을까?
사실 난 평생을 살면서 남의 돈을 빌려 쓴 적이 없다. 실수로 지갑을 챙겨 오지 않아 식사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잠시 빌려 식사를 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도 빚이므로 하루가 지나기 전에 반드시 갚는다는 원칙이 있다. 신혼집을 구하면서도, 차를 살 때도, 집을 살 때도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으나 그 흔한 대출 한번 받아본 적이 없다. 이 어려운 시기에 사업을 하면서도 나는 대출을 받아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감사할 일이지만 이것은 그저 사업이 잘되고 돈이 넘쳐나서가 아니다. 사업을 하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자본은 늘 부족하고, 직원들 급여와 대금 지급일은 늘 빨리 돌아온다. 이런저런 돈 걱정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이지만 타인의 돈을 빌려서 사업을 할 생각은 아직도 없다. 그렇다. 나의 비즈니스는 완전한 무차입 경영이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은 너무 강력하거나 고통스러워서 의식이 감당하지 못하는 생각이나 기억의 저장소로 기능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왜 돈에 대해 이렇게 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내가 돈에 대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어떤 강력하고 고통스러운 무의식 때문 아닐까? 학부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사실 나는 프로이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의 정신이 그저 성적 욕망의 지배 하에 있다는 것이나, 생애 초기의 경험이 성인이 된 자아를 통제하는 원인이 된다는 등등 그의 이론들은 청년 심리 학도가 받아들이기에 너무 근거 없고 논리적 비약이 심한 것이라 생각했다. 중간 기말고사에서 ‘프로이트에 대한 논하시오’라는 단 한 줄의 문제가 주어지면 '그건 다 의미 없는 헛소리’라는 한 문장으로 응답하고 싶었으나 그 학점이라는 것이 뭔지 단 한 번도 그를 비판하는 글을 써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늘 나는 다시 그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자들의 의견에 힘입어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해 보려 한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그 원인 되는 어릴 적 기억, 저 깊은 곳에 침잠해 있던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나의 유년 시절 가장 큰 비극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됐다. 다섯 살 아니 여섯 살 무렵의 기억이다. 내가 살던 동네의 중앙에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넓은 마당이 하나 있었다. 그 마당에서 또래 친구들과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 마당 주변에는 나보다 2살 많은 형이 살고 있었는데, 그 형의 집은 사각형 동네 마당과 맞닿아 있어 우리가 놀고 있을 때면 담벼락 높은 집 창에서 종종 말을 걸곤 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창 위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그 형이 내게 50원을 건 내기를 걸어왔다. 아주 오래된 일이라 내기의 내용에 대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 내기에서 내가 진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바로 나는 엄마에게 용돈으로 100원을 받아 그 형에게 건네주게 된다.
문제는 이다음부터다. 그 형은 하루가 지났으니 이자가 붙었다고 했다. 그 빚은 하루 만에 50원이 아니라 500원이 되었단다. 그 어린 나이에 500원을 감당할 능력이 안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100원을 다 빼앗기 고도 400원의 빚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의 무자비한 협박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까지 나머지 400원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빚은 1000원이 될 것이다 라고. 그리고 이 사실을 가족이나 우리 형에게 일러바칠 때는 그 빚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갈 테니 명심하란 말도 했었던 것 같다. 빚을 갚은 능력이 없었던 나는 그다음 날부터 그를 피하게 되었다. 한 일주일을 동네 앞마당에 나가지 못했다. 친한 친구 홍철이도 야민이도 너무 보고 싶었지만, 저 높은 창가에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을 그 형이 너무 무서웠다.
한 주가 지났을까? 당분간 그를 만나지 않게 되면서 나는 이 부채 의식을 좀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저녁에 엄마가 시킨 심부름 때문에 슈퍼에 다녀오는 길에 그 녀석에게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빚 400원은 일주 일 사이 백만 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날 심부름하고 남은 거스름돈 200원을 또 빼앗겼다. 그리고 머리도 몇 대 세게 맞았다.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그의 손은 매서웠고 나의 머리는 다른 무엇인가에 크게 맞은 것처럼 하얘졌다. 그리고 그의 협박은 수위가 더 높아졌다. 이젠 우리 집에 앞마당에 있는 앵두나무의 소유권과 음식, 물건 등을 구분하지 않고 자기에게 갖다 바칠 것을 강요했다. 이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새 빚은 1조, 1경으로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하게 된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때는 정말 혼란스럽고 괴로웠다. 1조라니, 1 경이라니. 밝고 착했던 나는 그 시절 정말 세상이라도 잃은 것처럼 위축되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변해 갔다.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던 나를 구해 준 건 4살 터울의 친형이다. 몇 주를 혼자 끙끙 앓았었는데 형이 나의 문제를 눈치채고 무슨 일인지 추궁했다. 처음엔 무서워서 말도 못 했다. 어쨌든 그간 있었던 일들을 형한테 일러바치고 우리 형은 그 녀석을 보기 좋게 두드려 패고 앞으로 이런 괴롭힘을 하지 않겠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 녀석의 형이 우리 형보다 한 살 더 많았는데, 우리 형도 그에게 흠씬 맞고 왔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렇게 나의 인생을 짓누르던 엄청난 빚은 우리 형의 영웅적 구원함으로 종료되었고, 그 후론 그 녀석의 괴롭힘도 더 이상 당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형의 개입은 크게 위축되었던 나에게는 너무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물론 지금 하나의 단편적인 기억으로 그 모습을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이게 내가 빚지기 싫어하는 나의 태도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기억이다. 어린 시절 기억의 소환을 하면서 나는 분석심리학의 개척자로 불리는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을 되뇌어 본다. 융은 개인의 자아가 단지 개인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 맞닿은 페르소나(persona) 뒤에 있는 사회적 자아(ego)와 내부 세계의 그림자(shadow) 앞에 있는 내적 자아(Self)로 구분한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은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의 상호 작용을 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에고는 자신을 둘러싼 외부 환경 속에서 인식하는 사회적 자아이고, 셀프는 내면의 자기로 통제하거나 조작할 수 없는 본질적인 체계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회적 자기 안에 잠자고 있는 내면의 자기를 발견하고 그것의 본질을 이해할 때 과거의 상처로부터 회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우리의 자아는 수많은 타인들과 관계 맺기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상처 입고 깨지면서 사는 것이 일상이고 우리의 현실이다. 나의 사례에서처럼 그 상처는 내면의 그림자로 남아 나의 삶을 흔들고 통제하며 그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나 나는 내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그림자를 꺼내 보면서 그때의 상처가 얼마나 우습고 어리석은 일들로 인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50원의 내기도 우습기 그지없지만 그에게 약점이 잡혀 1경의 빚을 지게 되고 온갖 협박을 당하며 얼어있던 그 어린 자아가 성인이 된 오늘 나의 자아와 대면하게 된 것이다.
진정한 자기를 찾으려면 에고(ego)에서 셀프(self)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자기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악행에는 당당히 맞서고, 타인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자신 만의 고유한 본성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이다. 밝을 명(明)이라는 한자는 해를 일컫는 일(日)과 달을 일컫는 월(月)이 합쳐진 것이다. 밝다는 것은 태양의 조도가 높은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흐릿한 달빛도 포괄한다는 것이 신기하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명암이 늘 공존한다. 그리고 밝고 좋은 세상은 그림자가 없는 세상이 아니다. 오히려 좋은 세상은 상처를 잘 관조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림자와 그림자들이 잘 소통하고 서로 돌보는 세상이면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이다. 많이 상처 받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나와 같이 상처 받은 사람에게 입장이 되어 공감하고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상처를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순결한 치유자가 아니라 상처가 있기에 타인의 고통을 더욱 공감할 수 있는 치유자가 될 수 있겠다.
기억을 되뇌어 보면 내가 심리학을 학부에서 공부한 이유는 나의 고통을 넘어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다. 내가 오늘 이 글을 쓰는 것도 여리고 상처 받은 나의 어린 시절 기억,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나의 이야기를 훗날 나의 독자들이 읽었을 때 조금의 위안과 또 자기의 상처를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다짐한다. 때론 너무 민감해서 또 흐릿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통해 나를 치유하고 또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글쓰기를 하겠노라고. 그리고 오늘도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타인의 시선에 좌우되는 종속적인 삶이 아니라, 나의 본능과 감각을 이겨내는 나만의 삶을 살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