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에 대한 단상
몇 년 전 막연히 농사를 지어볼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던 차에 지인의 소개로 작지 않은 땅에 농사를 지을 기회가 생겼다. 농사는 하늘과 한다고 했던가? 농사 짓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비가 많이 오면 걱정, 가물어 땅이 말라오면 또 물 걱정 또 바람, 일조량, 병충해 어느 하나 문제가 있으면 금새 작물에 문제가 생겼다. 그 중 가장 성가신 일은 뽑아도 뽑아도 올라오는 잡초 제거 작업이다. 땅을 갈아도, 제초기를 돌리고, 제초제를 뿌려도 그 질긴 잡초들은 어떻게든 살아서 작물을 망쳤다. 제초할 시기를 놓쳐 웃자란 잡초는 어느샌가 어른의 키를 훌쩍 넘게 자라게 된다. 그리고 더 심해지면 제초기로는 감당 할 수 없는 골치덩이가 되니 매우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성가신 잡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있다. 그건 바로 작물이 어느 정도 성장을 하고 뿌리를 잘 내린 이후이다. 신기하게도 이런 시기가 되면 어린 작물을 그렇게 괴롭히고 죽이던 잡초는 이제 성체가 된 작물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무성하던 잡초들은 부쩍 성장한 작물의 세력과 그늘 밑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종적을 감추곤 했다.
내가 잡초 얘기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얼마 전 북클럽 회원들과 함께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을 읽다 든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들 때문이다. 작가의 수필에도 잡초 얘기가 나온다. 이른 봄 앞마당에 올라오는 잡초를 뽑는 것이 얼마나 고역인지, 아스팔트 마저 뚫고 아오는 그것들이 얼마나 사람을 성가시게 하고 뒤숭숭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얘기들 말이다.
작가가 책 머리에 잡초 얘기를 했던 것은 본인이 경험했던 한국 전쟁의 참상과 수 많았던 그 억울한 죽음에 대한 괴로운 그 심정을 얘기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그 마음의 깊은 상처는 마치 심연에 자리한 잡초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뽑아 내고, 잘라 내고, 없애려고 갖은 노력을 해봐도 사라지지 않는 그 질긴 덩쿨과 뿌리들이란.
책을 읽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우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세월호를 떠올렸다. 그 단어를 듣는 것 만으로도 너무 슬펐다. 갑자기 수면 아래 있던 흙탕물을 휘저어 놓은 것처럼 감정을 올라왔고 또 먹먹하고 아렸다. 봄날의 창밖엔 봄꽃이 만연한데, 상처는 왜 이렇게 모질게도 살아 남아서 아직도 시퍼런 뿌리를 내리고 살아 있는걸까? 푸르던 4월의 날과는 너무도 다르게 그날 그 큰 아가리를 벌리고 그 많은 아이들을 앗아간 잿빛의 바다는 아직도 무섭기만 하다.
몇 년 전 중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 동기한테서 메세지가 왔다. 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초대해 희생당한 학생들 한명 한명의 이름을 가슴에 안고, 또 그 자족들을 위로하는 행사에 대한 얘기였다. 그때 그 행사의 내용을 보며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는 그 학교의 구성원들이 보여준 성숙하고 진심어린 위로가 너무 고마웠다. 성숙한 시민의식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 행사는 어김 없이 올해도 열린다고 한다.
그 고마운 마음을 기억하면서,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 질문해 본다. 잡초와도 같은 깊고도 질긴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박완서 작가는 자신이 글을 썼던 이유는 수십년이 지나도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상처를 치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렇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바로 억울한 죽음에 대한 외침이고, 나와 너의 위로이고 치유의 과정이다. 그것은 아픔을 견디고 또 읽어 내서 튼튼히 뿌리내리는 일이다. 그리고 모진 시련과 상처를 든든히 이겨내고, 그 그늘 아래가 안전하고 쉴만한 자리가 될때까지 계속 되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 한페이지 한페이지를 묵묵히 읽어 나가야할 나의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