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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흔들리는 희미한 모습들

한국의 괴테 전영애 선생님을 존경하며

by 아레테 클래식


다시 다가오누나 너희, 흔들리는 희미한 모습들!

일찍이 아직 흐린 내 눈길에 모습 보여주었던 이들.

이번에는 내가 너희를 붙잡아 볼까?

내 가슴 아직도 저 광기로 끌림이 느껴지니?

바짝 다가오네! 그래, 너희 강렬하게 여기 있는 것이리,

너희 나를 에워싼 몽롱한 안개에서 솟아오르니.

내 가슴이 젊은 날처럼 고동친다.

너희의 행렬을 감도는 마법의 입김으로 하여.


너희, 즐거웠던 날들의 영상을 더불어 가져오니

더러 그림자 되어버린 고왔던 이들도 떠오른다.

반쯤 잊힌 옛 설화처럼

첫사랑과 우정도 함께 떠오른다.

고통이 새로워지고, 그 탄식은 거듭

미로처럼 얽힌 인생의 흐름을 돌아보며

저 선한 이들을 이름 부른다, 아름다운 시간에

행복에 속아, 나보다 앞서 사라져간 이들.


그이들, 이젠 다음 노래를 듣지 못하네.

내가 첫 노래를 들려주었던 영혼들.

다정했던 무리는 흩어지고

첫 반향은 아아! 잦아들어 버렸구나.

내 노래가 이젠, 내가 모르는 이들 귀에 울리니

그들의 갈채조차도 내 마음을 두렵게 하네.

예전에 내 노래를 기뻐하던 이들은

살아 있어도, 뿔뿔이 흩어져 세상을 헤매네.


오래전에 잊은 그리움 하나 나를 사로잡네.

영들이 머무는 저 고요하고, 엄숙한 제국에의 그리움.

이제는 불확실한 음(音)으로 떠도네.

속삭이는 나의 노래, 바람이 울리는 하프처럼.

전율이 나를 사로잡네. 눈물에 눈물 쏟아지네.

엄하기만 하던 마음, 온화하게 누그러져.

아직 가진 것, 나는 훌쩍 떨어진 듯 바라본다.

하니 사라져버린 것, 차츰 현실이 되어온다.


<파우스트, 괴테(전영애 역), 길>



爲如白위여백 爲後學위후학 爲詩위시’


‘여백을 위하여’는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뜻도 있지만 이름 그대로 흰빛처럼 맑은 사람들을 위한 곳이라는 뜻을 담았다. ‘후학을 위하여’는 꼭 학자만이 아니라 생각을 하는 사람들, 배우려는 사람들을 다 염두에 둔 지칭이다. (평범한 고인을 위한 제문에도 ‘학생부군’ 하지 않는가.) ‘시를 위하여’에서는 ‘시’ 앞에다 처음에는 맑을 ‘청’ 자를 넣을 생각을 했으나, 다시 생각하니 맑지 않다면 어차피 진짜 시도 아닐 테니 굳이 제한을 넣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세 글자씩 글자 수를 맞추지 않고 두 글자로 두었다.

<인생을 배우다, 전영애, 청림출판>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내 마음의 스승이신 분이 있다. 전영애 선생님.


나는 그분을 통해 인생에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다음 생이 있다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서 그분의 문하생이 되어보고 싶다. 그런데 지금도 괜찮다. 아직 살아계셔서 자신의 작은 몸 하나 뉘이시기에도 부족한 공간에 만족하시며 수 많은 책들을 지키시며 살고 계시니까.


늘 건강하게 많은 이들을 위로하시길 기도한다. 선생님의 파우스트 번역본에는 괴테가 아닌 선생님의 삶이 어른거리는 듯 하다. 괴테가 살아있다면 쇼펜하우어보다 선생님을 더 아꼈으리라.


그리고 올봄에는 꼭 여백서원에 다녀갈 것이다. 꼭 밝고 큰 목소리로 인사할 것이다.


"어느 구간에서든 바르게 살겠다고.

이게 다 선생님 덕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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