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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Sep 17. 2021

일리아스: 삶과 죽음에 대한 유럽 최초의 슬픈 서사시

인류의 고전 일라아스를 독법


불타는 트로이, 출처 wikimedia


아킬레우스는 슬픔을 뜻하는 아코스라는 단어와 사람을 뜻하는 라오스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그렇다. 아킬레우스는 ‘슬픈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그는 누가 뭐래도 여신의 아들이고, 헤라클레스의 절친한 친구가 되어 헤라클레스의 아마조네스 원정 및 라오메돈과의 전쟁에 참가하기도 한 영웅 펠레우스의 아들이다. 일리아스에서도 그는 질주하는 사자와 같았으며, 감히 비교 불가능한 빛나는 영웅 중의 영웅이다. 당대 최고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슬픈 사람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아킬레우스가 주인공이 된 트로이 10년 전쟁의 이유는 그와는 상관없는 좀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 천척의 배를 출항하게 한 헬레네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미모가 출중했다. 영웅이자 단짝 친구였던 테세우스와 페이리토오스가 그 소문을 듣고 어린 그녀를 납치하자 오빠들이 군대를 끌고 가 구해 준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가 혼인할 나이가 되자 그녀의 아버지 틴다레오스(Tyndareos)의 집은 전국에서 몰려든 구혼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나 틴다레오스는 기뻐하기는 커녕 어찌할 바 모르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를 택하면 큰 싸움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머리 좋은 오디세우스는 그의 고충을 간파했다. 그는 틴다레오스에게 자신을 그의 형제 이카리오스(Ikarios)의 딸 페넬로페와 혼인하게 해 주면 고민을 해결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초조한 틴다레오스가 자신의 말에 동의하자 오디세우스는 구혼자들로부터 누가 그녀의 신랑이 돼도 앞으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 힘을 합해 도와주겠다는 맹세를 받아내라고 충고했다. 구혼자들은 틴다레오스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그제야 헬레네는 아버지의 지시대로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의 동생 메넬라오스를 택했다. 그 후 틴다레오스는 두 아들 폴리데우케스와 카스토르가 죽자 스파르타의 왕위를 사위에게 물려주었다. 아내 헬레네가 손님 파리스와 함께 사라지자 남편 메넬라오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사신을 극진히 환대한 것의 대가가  납치라니 메넬라오스가 가만히 있으리가 없다. 그는 형인 아가멤논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그리스 전역에서 헬레네에게 구혼하면서 맹세한 영웅들이 아울리스(Aulis) 항으로 모였다. 이것이 트로이 전쟁의 서막이다.


 당시의 전쟁은 근본적으로 약탈과 정복을 위한 것이었다. 아직 농경만으로는 배불리 먹을 수 없고, 교역을 통한 물자 수급도 원활하지 않았던 시대였으므로 전쟁은 고대인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생존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단순한 생존의 수단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재물을 좋아하는 인간의 욕망 분출하는 도구였다. 지나친 욕망으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왕과 영웅들은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일리아스는 이 전쟁이 헬레네를 향한 구혼자들의 동맹이라 설명한다. 이는 인간에게 잠재해 있는 욕망을 상징하는 비유였는지도 모른다.  이 전쟁이 진정 헬레네의 구혼자들의 연합 전쟁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의 어리석음과 그 대가로 흘린 수없이 죽어간 영혼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일리아스의 메인 주제인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자신의 명예의 상인 브뤼세이스를 빼앗아 가겠다는 아가멤논의 도발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이미 충분한 재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러나 적절히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이나 바람직하지 못한 결정은 우리 삶을 망치는 원인이 된다. 아가멤논의 욕망도 아킬레우스의 분노도 브레이크 없는 욕망에 사로 잡혀 서로를 향해 질주하는 무서운 폭주기관차 같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정한 불명예는 빼앗긴 아름다운 여인도, 수많은 재물도 아닌 욕망의 관리에 실패한 그들의 마음 상태였다.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필멸하는 인간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한계에 대한 감정이기도 하다.

신과 같은 권능을 가진 그였지만 그 역시도 필멸하는 운명을 그것도 트로이 전쟁에서 단명하는 운명을 타고난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우리가 단명할 운명이고 그리고 죽음 이후에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슬퍼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우리 인생이 슬픈 이유는 우리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 미래의 어느 순간에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먼지 같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현재를 살아갈 뿐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미래는 불안하고 낯설기만 하다. 우리 모두는 싸늘하게 주검으로 마무리할 인생이고, 처참하게 맞이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죽음 앞에 선 누구도 한 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  


 호메로스는 우리가 필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포자기하고 유유자적한 삶을 추구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서사시를 통해 딱 한 번 살아갈 운명이라면 명예로운 가장 훌륭한 삶을 살아 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일리아스에 나오는 영웅들은 한결 같이 명예로운 죽음을 갈망한다. 참혹한 전쟁의 참화 속에서 전공을 세우고, 동료를 지켜내며, 적과 용맹히 맞서 초개와 같이 자신을 버린다. 오히려 그들은 신들과 같이 영생할 운명이 아니기에 더 인생의 길고 짧음에 연연하지 않고 더 위대한 일을 꿈꾸고 행동하게 된다. 그리고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뛰어드는 아킬레우스의는 고대 그리스의 최고 영웅의 모습이다.


 친구 파트로클로스에게 약속한 것처럼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와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날 밤 그는 사랑하는 친구를 기억하며 울었고, 모든 것을 정복하는 잠도 그만은 붙잡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파트로클로스의 남자다움과 고상한 용기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남자들의 전쟁과 고통스러운 파도를 가로지르며 그와 더불어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루었고, 얼마나 많은 고생을 겪었는지를, 이런 것들을 회상하며 그는 굵은 눈물을 흘렸다. 때로는 옆으로 누웠다가 때로는 바로 누웠다가 또 때로는 엎드리기도 하면서,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 짠 바다 기슭을 따라 정처 없이 떠돌았다.


지금 이 순간 아킬레우스의 정의는 친구를 위해 명예로운 장례를 치러 주고(좋은 것을 주고), 적에게는 잔인하게 복수(헥토르의 시신을 훼손하는 것)하는 것이다. 하지만 친구에게 약속한 그 모든 것을 다 이룬 지금도 아킬레우스는 한 없는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헥토르는 값을 받고 자기 시신을 돌려주어 장사지 낼 수 있게 해달라고 다시 부탁하는 장면을 기억해 봐야 한다.

   

내 그대의 목숨과 무릎과 어버이를 걸고 애원하노니,  나를 아카이아인들의 함선 옆에서 개들이 뜯어먹도록 내버려 두지 말고, 나의 아버지와 존귀하신 어머니께서 그대에게 선물로 주게 될 많은 양의 청동과 황금을 받고 내 시체를 집으로 돌려보내 트로이아인들과 그들의 아내들이 죽은 나에게 화장의 예를 베풀 수 있게 하라

(일리아스 22권 338~343행)


아킬레우스는 아무리 큰 몸값을 가져와도 돌려주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절한다. 오히려 그는 헥토르의 살을 저며 먹고 싶다는 충동을 드러낸다. 헥토르의 시신을 훼손하는 문제는 신들의 노여움을 사는 빌미가 된다. 아폴론은 아킬레우스를 자기 힘과 용기만 믿는 사자에 비유하며 비난한다. 그 슬픔에는 한계가 있는 법인데, 그는 끝없이 시신을 모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예를 가져다주는 행동이 아니며, 오히려 신의 노여움을 살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인생에서 자신의 에너지를 잘 분출할 수 있는 출구 전략이 필요하다. 욕망을 통제할 수 없으면 큰 화가 돌아오기 마련이다. 적절히 제어되지 않는 욕망이나 바람직하지 못한 형태의 분출은 우리들의 삶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정의와 불의,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삼가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간청하는 프리아모스 출처. wikimedia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우스를 만나러 별도의 무장이나 병력 없이 노구의 몸을 이끌고 적진 중심으로 들어간다. 늙은 왕이 헤르메스의 도움으로 적진 깊숙이 들어와 동정심에 호소 후, 자신이 헤아릴 수 없는 몸값을 갖고 온 것을 밝히는 장면은 일리아스의 클라이맥스라 해도 손색이 없다. 노왕은 아킬레우스의 천막에 들어와 두 손으로 아킬레우스의 무릎을 잡고 자기 아들을 수없이 죽인, 남자를 죽이는 무시 무시한 두 손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아킬레우스에게 신을 두려워하여 자기를 동정하라고 청한다. 자식을 죽인 자에게 목숨을 걸고 탄원한다.

          

노인의 이러한 탄원을 듣고 아킬레우스는 갑지가 울음이 북받친다. 노인의 손을 잡아 슬며시 뒤로 밀어 놓고는 통곡하기 시작한다. 프리아모스도 운다. 노인은 아들을 위해, 젊은이는 늙은 아버지와 친구를 위해 통곡한다. 사람들은 조마다 슬퍼할 자기만의 사연이 있다. 충분히 울고 나자, 아킬레우스는 노인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자기 아들들을 수없이 죽인 자를 만나러 혼자서 적진을 뚫고 온 대담함에 대해 칭찬한다. 노인에게 울음을 그치고 일단 자리에 앉기를 권한다. 인생에는 기쁨과 슬픔이 섞여 있기 마련이라고 위로한다


그리고 하녀를 불러 헥토르의 시신을 씻기고 기름을 발라 주라 명한다. 이제 시신을 잘 가다듬어진 채 깨끗하게 준비된 옷을 입힌다. 그리고 아킬레우스가 손수 침상에 눕힌다. 동료들이 시신을 수레 위에 올린다. 이 순간에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이름을 부르며,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사과한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친구를 죽인 사람의 아버지에게 자비를 베푸는 과정에서 큰 변화를 경험한다. 이것은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명예에서, 친구의 우정을 지키기 위한 복수로, 이제 적장을 향한 공감으로의 변화이다. 일리아스를 통틀어 가장 극적이고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의 가장 명예로운 선물은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를 뿐이다. 내가 누군가의 친구이자, 형제이고, 아들인 것처럼 저들도 그런 존재들인 것이다. 이제 헥토르와 프리아모스는 단순한 적이 아니라, 나 자신이고 나의 아버지가 된다.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공감하는 능력, 비록 적일지라도 큰 슬픔을 겪은 이에게 기울여지는 긍휼한 마음을 통해 그는 마치 신과 같이 빛나고 있다.


 

필멸하는 인간이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 모두가 죽을 운명이라면 우리가 살면서 이룬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면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려고 애써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삶에서 어떤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가? 누구나 살아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기원전 고대 그리스인들이 던졌던 그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치고, 병들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운명은 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죽음의 문제는 더욱 절실하고 가까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이제 어느 누구도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고 주어진 삶을 그냥 의미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어느 날 문득 죽음이 다가왔을 때 아무런 준비 없이 인생이 마무리된다고 상상한다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할까? 혹은 삶에 힘겹고 한 없는 슬픔에 허우적거릴 때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었던 것일까를 질문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랬듯이, 죽음의 문제에 대한 깨달음이나 답은 항상 모호하면서도 불확실하다. 하지만 필멸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쌓이는 동안 우리의 시야는 조금씩 넓어지고 지혜도 늘어갈 것이다. 호메로스의 통찰을 깊이 음미하고 숙고하는 것 자체가 우리 인생을 지탱해 줄 에너지가 될 것이고, 그를 통해 우리는 더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서 성장은 완성되고 정의된 명사가 아니라 현재 진행하는 동사여야 한다. 운명의 화살은 쏘아졌으나 그 방향이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생의 나침반은 내 손에 쥐어졌으므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는 내가 정해야 할 몫이다.


 이제 일리아스 읽기를 마무리한다.   동안  책을 읽으면서  기쁨을 누렸다. 수천  전에 살았던 영웅들을 만났고, 전장에 꽃핀 그들의 삶과 죽음의 이유를 숙고했다. 무엇보다  유익은 지적 성장과 함께 이제껏 경험해 보지 않은 세계에 대한 간접 경험이겠다. 새벽 미명 샤프란 색으로 밝아 오던 로이의 해안을 걷기도 했다. 아직도 별이 총총히 빛나던 지중해의 밤하늘이 또렸이 기억나는 듯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대를 초월해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생각한다. 서로의 삶을 통해 서로를 들여다보고 연민하고 긍휼한 마음을 갖는다면 전쟁과 같이 치열한 세상을 든든히 이겨 나갈 힘과 지혜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자화상 슬픈 우리의 아킬레우스도  이상 단명할 자신의 운명에 분노하며 슬피 우는  눈물을 걷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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