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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Mar 16. 2024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신화와 문학적 상상력의 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신화와 문학적 상상력의 힘


1. 모험을 떠나는 어린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우리 집에는 세계명작동화 전집 중 절반인 20권 정도의 책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책을 파는 외판원의 방문에 혹해서 전집을 사기로 하셨다가 매월 납부해야 할 할부금 걱정에 방문 판매 사원을 설득해 절반만 30%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하신 기억이 난다. 피터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허클레리 핀의 모험, 톰소여의 모험 등 당시의 어린이 동화들은 모두 어린이들이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떠나는 모험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메칸더 브이: 원자력 에너지에 힘이 솟는다>

그 당시는 방송국도 MBC, KBS, EBS 이렇게 딱 3개만 있던 시절이라 볼만한 어린이 프로그램은 아침에 <뽀뽀뽀>나 저녁에 하는 <메칸더 브이>와 같은 만화 프로가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책장에 꽂혀 있던 세계명작동화를 읽는 일은 나에게 가장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책을 읽다가 몰입하면 나는 옷장이나 다락방에 올라가 책 속의 주인공처럼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4차원의 문을 발견하려고 애쓰곤 했다. 특히 컴컴한 이불장은 내가 자주 찾던 아지트였다. 장롱 이불장 안에 들어가서 양문을 닫고서는 이상한 주문을 외우곤 했었다.


한 번은 어두운 장롱 안에서 깜빡 잠이 든 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일어나니 온통 칠흑 같은 어둠만 보였다. 나는 울며 어머니는 불렀다. “엄마, 엄마… 엉엉~” 어머니는 밤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나를 찾아 온 동네를 뒤지고 다니시다가 찾지 못한 후 혹 집안에 있을지도 몰랐기에 내 이름을 크게 불렀던 것이다. “이놈의 짜슥아~ 거~는 만다고 들어가서 낼로 이래 맴 고생을 시키노? 어이?” 엄마에게 엉덩짝을 한대 세게 치신 후 나를 꼭 안아 주셨다.


그 이후로도 나의 아지트는 집안의 옷장, 장롱, 다락방을 넘어 마을 뒷산의 작은 동굴, 큰 나무를 세로로 세워서 만든 인디언 집, 나무 위에 넓은 판자를 올려 만든 톰소여의 집으로 확장되었다. 하루 종일 온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노닐었던 것은 신비한 문을 열고 찾아 나선 용감한 어린이의 모험과 다를 바 없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고향 영천은 사과, 포도, 복숭아, 자두가 사시사철 열매를 맺던 풍요로운 곳이었다. 하천도 많아서 여름에는 거의 매일 개울가에서 수영도 하고 낚시도 했다. 어린 녀석들은 도구 없이도 물고기를 잘 잡았었다. 물론 나는 예외다. 순하고 둔했던 나는 낚시나 수렵에는 잼병이었다. 맨날 옆에서 구걸하며 얻어먹는 처지였다. 꼭 물고기를 잡아야만 하는 건 아니다. 강태공의 낚시도 낚시 아니었던가?


2. 상상력을 잃어버리다.


나는 신의 존재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는 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성서비평학이라는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성서비평학(Biblical criticism)이란 문학으로써 성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를 하나의 문헌(literature)으로 간주하고 인간의 이성에 기반한 합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성서를 해석하는 행위를 말한다. 성서비평학에 대한 여러 서적들을 읽으면서 나는 어려서부터 ‘거짓이 없는 신의 말씀’이라고 믿어 왔던 진리관을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었다.


특히 성서를 ‘신화’ 혹은 ‘전설’로 이해하는 신학자들의 해석에 대해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성서는 일점일획도 그릇됨이 없다던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성경무오설)과는 달리 성서 내부와 외부의 많은 증거들은 성서가 그릇됨이 없는 진리의 체계라기보다 의미 있는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문헌이라는 설명에 설득당했던 것이다. 그때 신화는 거짓이라는 나는 단순한 프레임에 갇혀있었다. 성경은 그냥 허구적 신화이므로 그저 좋은 교훈을 얻는 정도의 이야기로 한정시켜 이해하기로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시간이 한참 지나 40대가 되어서 신화에 대해 제대로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일리아스, 오뒷세이아를 비롯한 신화, 비극, 희극, 역사 등 고대 그리스 문학을 탐독했다. 그러던 중 신화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되었다. 신화(그리스어:muthos, 영어: myth)는 원래 ‘말’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주저 시학에서 창작의 바탕에는 ‘미메시스’와 ‘뮈토스’가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미메시스’는 모방이고 ‘뮈토스’는 이야기 혹은 줄거리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시는 어떤 이야기를 모방 혹은 재연한 것으로 규정했다. 여기서 시는 현대적 의미의 시라기 보다 서정시, 서시시, 비극, 희극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는 가지고 있다.


시학에 따르면 회화와 조각은 시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회화나 조각은 모방이기는 하지만 줄거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춤이나, 음악은 시에 포함된다. 움직임, 선율, 리듬 등은 인간의 행동이나 감정 등을 모방한 것이고, 그것을 설명하는 이야기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시는 현대의 소설,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각종 콘서트 등의 장르를 포괄하는 의미인 듯하다.


나는 처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읽었을   충격빠졌다. 그에 따르면 신화는 거짓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삶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  하나였던 것이다. 그리고 고대로부터 인간은 이런 문학적 예술적 노력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려 애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오랜 시간 신화의 진리를 부정하고, 신화적, 문학적 상상력을 황당한 이야기 정도로 무시하는 매우 좁고 어리석은 식견을 신뢰하며 지내온 것이다. 그야말로 눈뜬장님처럼 험한 세상을 부유한  같았다.


성경, 그리스 신화, 불경 등은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다듬어지고 전승된 문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문헌들을 읽거나 듣는 많은 사람들은 어떤 교훈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신비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것을 읽고, 해설하는 사람들은 신성한 권위를 상징하는 현자들이었다.


3. 무사의 여신을 부르는 이유


서양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진 일리아스는 이런 서시로 시작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들을 하데스에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인간들의 왕이 아트레우스의 아들과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처음에 서로 다투고 갈라선 그날부터 이렇듯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도다.

 <일리아스, 호메로스(천병희 역), 소나무>


현재 내가 연재 중인 단테의 <신곡_지옥편>에도 이런 서시가 있다.


내 기억은 이 모든 것을 틀림없이 기록하리라. 아, 무사여, 지고의 지성이여, 날 도우소서! 아, 내가 본 것을 기록하는 기억이여! 여기서 그대의 고귀함을 드러내다오!

<단테 신곡_지옥편, 박상진, 민음사>


단테를 안내했던 로마의 시성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도> 호메로스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무사 여신이여 나에게 그 이유를 말해주소서, 신들의 여왕이 신성을 어떻게 모욕당했기에 속이 상하여 그토록 많은 시련과 그토록 많은 고난을 더없이 경건한 그 남자로 하여금 겪게 하였는지를

<아이네이스 제1권 9~12행>


위의 작품들에서 부르고 있는 여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무사의 여신들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무사의 여신들은 보통은 복수형인 무사이(Μοσαι, Mousai), 단수형은 단수형은 '무사'라고 부른다. 음악(Music)과 박물관(Museum) 등은 모두 무사이를 어원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학문과 예술을 관장하는 아홉 여신으로 무사이는 복수형이고, 무사는 단수형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뮤즈(Muse)는 이 여신의 영어식 표현이다. 이 여신들의 자세한 역할은 아래 도표를 참고해 주길 바란다.


<무사이 여신들>

기원전 약 1200년경 지금의 튀르크 지역에서 그리스 진영과 트로이아 진영이 10년 동안 했다던 전설적인 전쟁은 기원전 9~8세기, 그리스에서 문자가 상용화될 즈음 시성 호메로스에 의해 집대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자가 정립되지 않은 오랜 기간 동안 이 이야기는 사람의 입과 입으로 전해지며 명맥을 이어왔을 것이다. 인간의 기억은 그리 신뢰한 만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서사시인은 시공을 초월한 무사의 여신의 기억력에 의존에 본인이 낭송하는 서사시의 신뢰성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무사의 여신에게 기도하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제의의 성격이 강했을 뿐 아니라 제의를 집행하는 시인의 권위를 보장해 주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시인이 낭송하는 서사는 무사 여신의 든든한 지원을 받아 진정한 영웅들의 이야기로 부활했다. 시인이 낭송하는 노래를 듣는 청중들은 오래전 트로이아에서 있었던 전쟁의 재현을 들으며 필멸하는 인간이 죽음을 초월해 자신들 앞에 생생히 살아났다는 사실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그 후 작품의 도입부에서 무사의 여신이 노래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은 문학사의 거대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호메로스의 고전들은 로마 문학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로마 제국이 유럽을 통일한 이후에는 이런 전통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로마 제국의 어린이들은 어려서부터 호메로스를 암송하며 자라났다. 이제 무사의 여신을 부르는 것은 단순히 신에게 드리는 제의를 넘어 문인들이라면 본받고 싶은 문학의 전통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4. 누가 장님인가?


일리아스를 처음 읽다가 일리아스를 썼다고 알려진 호메로스가 장님이라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은 호(ho=the), 메(me=not), 호론(horon=seeing)이라는 단어의 조합인데, 이것을 합쳐 보면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그는 눈이 멀었기에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시각적 능력은 상실했지만,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다. 동서양에서 장님이지만 신묘한 예지력을 가진 전설을 종종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호메로스가 이렇게 장대하고 아름다운 서사시를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가 눈이 먼 장님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주제는 철학의 오랜 숙제였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우리에게 보이는 세계는 허상일 뿐 진정한 세계는 이상적 세계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시공을 초월한 비물질적, 절대적인 영원의 실재가 있다고 믿었다. 이데아란 객관적이고 불변하는 사물의 본질로서 순수한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중세에는 신 안에 존재하는 만물의 원형으로 인식되었으며, 오늘날도 관념 또는 이념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근대는 중세 이전의 이런 관념적 세계관에 도전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칸트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시도했다고 평가받는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 이론 중 물자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에서 "우리에게 사물은 우리 밖에 존재하며 우리 감각의 대상으로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 사물 자체가 무엇인지에 관해 전혀 알지 못하며 단지 그 사물의 현상만을 알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즉, 우리는 사물자체(물자체)를 완전히 인식할 수 없고 다만 현상의 세계만을 알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외부 세계는 우리의 감관과 오성, 경험과 사유를 거쳐 인식된 것일 뿐 사물의 본질 혹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름도 생소한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그의 저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사물 자체를 본다. 세계란 우리가 보고 있는 바 그것이다. 이러한 유의 표현은 자연적 인간과, 눈을 뜨면서부터 철학자가 공통적으로 갖는 신념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우리의 삶 속에 부리 내리고 있는 무언의 ‘의견들’의 심층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신념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어서 우리가 이 신념을 명제 또는 진술로서 명확히 발언하고자 하면, 우리는 무엇이고 본다는 것은 무엇이며 사물이나 세계는 무엇인지 자문하게 되면, 우리는 헤어날 수 없는 어려움들과 모순들에 봉착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메를로 퐁티, 동문전>


나는 이러한 근현대 철학자들의 통찰을 접하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은 과학법칙이나, 역사적 사실주의, 과학적 심리학과 무수한 객관적 사실과 개념들로 이루어진 듯 하지만 우리의 삶과 미래는 1분, 1초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과학적 사실이 전제하는 것은 통제된 실험실이나 과거에 누적된 결과들의 통계적 유의미함을 보여줄 뿐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혼돈 속에 던져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는 사실 40대가 될 때까지 소설 하나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한때는 허구적 소설을 읽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조소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나는 최근 철학적 서적들보다 문학 책들을 손에 가까이 두는 일이 잦아졌다. 어릴 적 내가 읽었던 모험하는 어린이들의 이야기처럼 문학은 현실 속에 일어날 것만 같은 것들을 기반으로 내가 볼 수 없는 등장인물들의 은밀한 마음 상태, 생각, 감정 등을 내게 전달해 준다. 문학은 내가 만나보지 못했던 존재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 우리 삶에 신화적 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는 사실상 우리가 눈뜬장님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세계는 보이는 것이 집착하는 인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또 이전에 없던 새로운 기술과 세상을 창조하고자 도전했던 많은 사람들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다. 스티브 잡스가 없었다면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폰은 소크라테스와의 한끼 식사를 위해 엄청난 재산을 포기하겠다던 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것이다.


5. 서양의 모든 위대한 작품은 일리아스 or 오뒷세이아


큰 늪의 질척한 땅에서 자란 미끈한 포플러 나무처럼 그는 땅 위 먼지 속에 쓰러졌다. 맨 꼭대기에만 가지들이 나 있는 이 포플러 나무는 어떤 수레 제조공이 훌륭한 수레바퀴 테로 구부러 쓸 양으로 번쩍이는 무쇠로 베어 남겼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강둑에 누워 시들어 가고 있다.

<일리아스 4권 482-487>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라아스는 많은 영웅들이 필멸의 생을 던지면서까지 쟁취한 불멸의 명예에 대한 이야기였다. 용감무쌍한 인간들은 전신갑주를 취하고 긴 창과 벼려진 칼을 들고 적과 목숨을 걸고 자웅을 겨뤘다. 신들과 같은 건장한 체격의 영웅들은 서로의 몸과 장기 관통시키며 상대를 하데스로 보낸다. 거대한 장수들은 포플러 나무처럼 쓰러져 나갔다. 전쟁 터에서 용맹하게 싸운 영웅들을 보며 우리는 명예가 무엇인지 배우기도 할 것이다. 반대로 먼지 속에 아스라이 사라져 간 필멸하는 인간들의 숙명을 바라보며 허탈해 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은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집을 떠나 고난을 당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모험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매일 아침 일어나 ‘콩나물시루 같은 지옥철’을 타고 회사로 향한다. 치열의 삶의 전쟁터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전투를 치러야 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투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때로는 경쾌할 것이고 때로는 무거울 것이다.


한편 우리는 어머니의 태 속에서 나오면서부터 미지의 세계를 향한 항해를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지나, ‘전쟁 같은 사랑’을 경험하고, ‘회사 안은 전쟁이고, 회사 밖은 지옥’인 현실 속에서 좌충우돌하며 각자의 처절한 인생을 살아나가고 있다. 그중 가장 빛나는 지략가 도시의 파괴자 영웅 오뒷세우스는 10년 무명 생활을 통해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세상의 풍파와 격랑을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가? 그 알 수 없는 인생의 의미를 시인 보들레르는 이렇게 노래했다.



어느 아침 우리는 떠난다.

뇌수는 불꽃으로 가득하고,

원한과 쓰라린 욕망으로 부푼 가슴을 안고,

그리고 우리는 간다.


물결의 선율을 따라,

끝이 있는 바다 위에

우리의 끝없는 마음을 흔들어 달래며


....중략.....


그러나 참다운 여행자는

오직 떠나기 위해 떠나는 자들,

마음 가볍게, 기구와 같이,

제 몫의 숙명에서 결코 비켜나지 못하건만

까닭도 모르고 노상 말한다, 가자!


[샤를 보들레르의 시 여행 중]



어차피 우리 인생에 까닭은 없다!

가자! 어차피 주어진 운명이라면~


<참고 문헌>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김헌, 서울울대출판부

단테 신곡 지옥편, 단테(박상진), 민음사

시학, 아리스토텔레스, 민음사

아이네이스, 베르길리우스(천병희 역), 숲

오뒷세이아, 호메로스(천병희 역), 숲

일리아스, 호메로스(천병희 역),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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