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철학으로 다시 보는 쇼생크 탈출
대학 시절, 나는 영어회화를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영화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을 수십 번 넘게 반복해 보았다.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다 보니 앤디 듀프레인의 목소리는 내 머릿속에서 내레이션처럼 울렸다.
그 중
“Get busy living, or get busy dying”
(바쁘게 살거나 혹은 바쁘게 죽거나)
이라는 문장은 나에게 일종의 인생의 좌우명처럼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영어 회화를 위한 도구 이상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사상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쇼생크 탈출을 떠올렸다. 그 영화가 담고 있던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 고통을 긍정하는 태도, 그리고 자유에 이르는 투쟁은 니체의 사상을 그대로 형상화한 서사처럼 느껴졌다. 오늘 그 시절 좋아했던 영화의 30주년을 기념해 니체의 사상으로 한번 곱씹어 보려 한다.
하나. 운명애(Amor Fati) –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나에게 일어나는 것을 사랑한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공식을 말하자면, 삶에 대한 사랑이다. 나는 어떤 ‘어떻게’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다. Amor fati: 내가 바라는 것은 더 이상 어떤 것이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 무한히 반복되더라도 사랑하는 것이다.”
앤디 듀프레인의 삶은 바로 그런 운명애의 구현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차디찬 감옥에 수감되고, 모욕과 폭력을 견디며 19년을 보낸다는 것은 어떤 이에게는 삶의 파탄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앤디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부정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의미를 창조한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도서관을 만들고, 동료 수감자들에게 교육을 제공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앤디는 영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That’s it! Step aside, this fucker’s havin’ hisself hisself a hissy-fit! I’m tellin’ you, that’s it! This is it, I’m done! This place ain’t so bad.”
( “됐어! 이놈 또 발작했어. 이게 끝이야! 이젠 그만이야! 이곳도 그리 나쁘진 않다.”)
이 말은 겉으로는 좌절처럼 들리지만, 그 아래에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다시 일어서겠다는 결심이 담겨 있다. 니체가 말한 “어떤 어떻게라도 견딜 수 있는 자”로서의 모습이다. 감옥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부조리 속에서도 앤디는 그것을 자신의 내면적 성장과 자유의 통로로 만든다. 이는 곧 니체가 말한 운명을 사랑하는 자의 초상이다.
둘. 초인(Übermensch) –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니체는 이렇게 선언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너는 무엇을 하여 인간을 극복하는가? 초인은 인간을 극복하는 의미다.”
앤디는 수감자라는 정체성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그는 감옥에서의 삶을 수동적으로 견디지 않고, 스스로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방식을 창조해 낸다. 간수들의 세금 문제를 해결하고, 감옥 내 경제 시스템을 장악하며, 레드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입하는 그의 모습은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초월한 창조자에 가깝다.
그가 말하는 유명한 대사:
“I guess it comes down to a simple choice, really. Get busy living or get busy dying.”
(“결국 간단한 선택으로 귀결되는 것 같아요. 바쁘게 살거나, 바쁘게 죽거나.”)
이 말은 삶에 대한 단순한 긍정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의미를 선택할 수 있는 인간, 즉 초인의 선언이다. 초인은 삶의 고통과 무의미 속에서도 의지를 통해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창조하는 자다. 앤디는 그런 의미에서 감옥이라는 절망 속에서 스스로의 길을 찾아낸 초인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에서 인간 존재의 핵심을 힘에의 의지, 혹은 창조에의 의지로 규정한다.
“삶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appropriation(소유), injury(상해), overpowering(지배), suppression(억제), and exploitation(착취)이다.”
여기서의 ‘힘’은 단순한 정치적 힘이나 권위가 아니라, 삶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내적 충동이다. 앤디는 감옥에서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재창조한다. 브룩스가 자살을 선택했던 그 감옥에서, 앤디는 도서관을 만들고, 음악을 틀어 자유를 상기시키고, 동료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 모든 행위는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삶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창조 행위다.
그 유명한 음악 장면에서, 앤디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한 곡을 확성기로 틀어 감옥 전체에 울려 퍼지게 한다:
https://youtu.be/un7tf_iCGPA?si=9CzIhhnpFAHy5fQE
“To this day, I have no idea what those two Italian ladies were singing about. Truth is, I don’t want to know. Some things are best left unsaid. I’d like to think they were singing about something so beautiful it can’t be expressed in words.”
(해석: “오늘날까지도, 그 두 이탈리아 여성이 무엇을 노래했는지는 모릅니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아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것에 대해 노래했다고 믿고 싶어요.”)
이 장면은 단순한 감성적 해방이 아니라, 억압된 공간에서 인간 정신이 창조적으로 솟구치는 순간이다. 그것은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가 음악이라는 형태로 분출된 것이라 믿고 싶다.
넷.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 – “이 삶을 다시 살아도 괜찮은가?”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인간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인생을 한 번 더, 수없이 더, 다시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네 인생의 모든 고통과 기쁨, 모든 생각과 탄식, 모든 말과 침묵이 다시 돌아온다면? 너는 이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앤디의 삶은 고통과 억압, 폭력과 절망으로 가득 찼지만, 그는 그 모든 시간을 그대로 살아낸다. 후회하거나 지우려 하지 않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가 마지막에 도달한 자유는 단순한 물리적 탈출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인생 전체를 긍정할 수 있는 해방이다.
앤디가 레드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
“Hope is a good thing, maybe the best of things, and no good thing ever dies.”
(“희망은 좋은 것이에요. 어쩌면 가장 좋은 것. 그리고 좋은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이 희망은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의 긍정과 맞닿아 있다. 그는 자신의 고통과 시간들을 온전히 껴안고, 그것이 다시 반복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가장 고귀한 삶의 방식이다.
나가며 – 철창을 부수는 것은 마음이다
쇼생크 탈출은 단순한 감옥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떻게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창조하며, 기존의 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철학적 우화다. 니체는 인간을 단순히 견디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존재, 즉 초인으로 바라보았다. 앤디 듀프레인은 감옥이라는 부조리의 세계 속에서도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마침내 그를 가두던 벽 너머로 나아간다.
나는 여전히 이 영화를 다시 본다. 대사를 따라 말하고, 장면의 숨결을 느낀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한 영어회화의 연습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묵상을 위해서다. 니체는 물었다: “이 삶을 다시 살아도 괜찮은가?”
앤디는 대답했다: “
Hope is a good thing.”
그리고 나 역시 대답할 수 있다. 그 삶이 쇼생크처럼 의미로 가득 찬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다시 살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