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에 우리가 있다

작고 소중한 것들

by 아레테 클래식

주말 아침. 아직 세상은 본격적으로 깨어나지 않은 채, 가느다란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조심스럽게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자전거를 끌어내어 낯선 길을 향해 나섰다. 땅 위엔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은 채 반짝이고 있었고, 골목 어귀의 나무들도 새벽바람을 머금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바람은 피부를 부드럽게 스치며 귓가에 속삭였고, 자전거 바퀴는 그 고요한 아침 공기를 갈라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길가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작은 고개를 들어 햇살을 마주하고 있었고, 어디선가 흘러나온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공중에서 잠시 머물다 이내 멀어졌다. 그 순간 나는, 아주 작은 평온이 내 안에 천천히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낯선 길이 낯설지 않고, 외로운 마음이 외롭지 않았다. 이 평범한 순간이야말로 삶의 의미를 가만히 비추는 창이 아닐까 생각했다. 눈에 띄지도, 설명되지도 않지만, 그 자체로 충만한 한 조각의 삶.


우리는 흔히 삶의 의미를 거창하게 상상한다. 어떤 위대한 업적, 뚜렷한 사명감, 혹은 철학적 명제들 속에서만 삶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는,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 한 그릇에서, 마음을 다해 쓴 손 편지 한 장에서, 그리고 손끝으로 한 땀 한 땀 꿰매어 만든 수제 노트 속에서 삶의 진짜 얼굴을 본다. 그렇게 작고 소박한 것들이 하루의 리듬을 만들고, 나를 다시 걷게 한다. 배나무로 깎아 만든 만년필의 부드러운 촉감은, 어느 날에는 글을 쓰게 하고, 또 어떤 날에는 그냥 가만히 들고 있기만 해도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그것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감정과 기억, 시간을 담아내는 그릇이 된다. 글을 적는다는 것은 결국 내 안에 흘러가는 생을 천천히 따라가는 일이다. 나는 삶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글을 쓰고, 삶의 감각을 붙들기 위해 기록을 남긴다. 종이에 새겨진 단어들은 내 삶의 족적이자, 존재의 흔적이다.


삶은 본래 추상적인 개념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개념들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무언가를 억지로 설명하려고 애쓸 때 생겨난 대체물일 뿐이다. 실제의 삶은 훨씬 더 물질적이고, 감각적이며, 관계적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의 변화를 감지하는 순간들 속에서, 그리고 때로는 그런 관계들이 해체되고 무너지는 시간 속에서조차 삶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별빛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을 보는 일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구라는 별 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안에서도 지극히 작은 존재라는 깨달음을 조용히 전해주는, 우주의 시적인 알림장이다. 도시의 불빛이 잠시 사라진 어느 외곽에서 본 밤하늘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경건함을 품고 있었다. 그 아래 서 있을 때면,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고, 그럼에도 얼마나 고귀한지 알 수 있다. 비릿한 바다 내음과 저 멀리 울리는 뱃고동 소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어떤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삶은 늘 그렇게, 소리와 냄새와 빛으로 우리 곁에 있다. 거기엔 거대한 철학도, 근사한 말도 필요 없다. 삶은 이미 자기 언어를 갖고 있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전해지던 따뜻한 온기, 어린 시절 눈빛 하나로 세상을 다 품으려 했던 아이의 순전한 호기심, 그리고 예고 없이 찾아와 기분을 환기시켜 주는 우연한 경험들. 그런 조각들이 모여 삶의 결을 만든다. 우리가 흔히 소중하다고 여기는 가치들—사랑, 배려, 용기, 진심—도 결국 이 작은 조각들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삶은 언제나 작고 소소한 것들 속에 깃든 주인들이다. 그것들은 과장되지 않으며,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천천히, 우리 안에 머물며 변화를 만든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차 한 잔의 온기, 창가에 걸린 노을빛 커튼의 흔들림, 먼지 낀 책장에 손을 얹을 때의 느낌. 삶은 언제나 우리를 감싸고 있지만, 우리가 그 감각을 닫을 때만 사라진다. 그래서 삶을 다시 느끼는 일은, 어쩌면 감각을 다시 여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삶이 항상 가볍고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실 정말로 힘든 것은 외부의 고통보다도,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인격’이라는 이름의 얼룩진 기억들, ‘마음’이라는 미로처럼 얽힌 감정들, 그리고 의식 아래 잠겨 있는 무의식의 심연. 그것들은 종종 우리를 질식시킬 만큼 무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하고,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의 무게조차도 삶의 일부다. 그 무게를 밀어내는 대신, 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조금 더 성숙해지는 것 같다.


신기하게도, 그런 심연의 틈 사이를 오가는 존재들이 있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문장일 수도 있으며, 혹은 어느 날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일 수도 있다. 이 순례자들은 오래 머물지 않지만, 단숨에 우리 마음의 공기를 바꾸어 놓는다. 말없이 건넨 눈빛, 우연히 들은 노래 한 구절, 그 모든 것이 우리를 다시금 살아가게 만든다. 순례자들은 무겁고 어두운 마음 위를 조용히 지나간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우리는 안다. 그들이 건넨 손길이 삶을 붙드는 결정적 계기였다는 것을.


그러니 무거운 마음일랑, 억지로 붙들고 있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순례자들에게 맡겨 보내도 좋다. 그들은 어쩌면 그 무게를 가볍게 접어, 다시 누군가의 마음속에 도달할 것이다. 위로는 그렇게 전달되고 순환된다. 때로는 한참을 돌아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우리에게 도착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도달한 위로는,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선물이 된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작은 바람이 되어, 그저 조용히 다녀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나는 요즘, 또 하나의 조용한 행복을 배운다. 딸아이와 함께 땀 흘리며 자전거를 타고, 농구공을 주고받는 시간. 그 시간은 단지 건강을 위한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웃고, 숨을 고르고, 서로의 리듬을 느끼는 아주 귀한 교류다. 그녀가 “아빠, 오늘도 갈 거야?” 하고 묻는 그 말속에는 기다림이 있고, 신뢰가 있고, 함께한 기억이 쌓여 있다. 운동이 끝난 뒤, 서로의 땀에 섞여 있는 햇살의 냄새와 숨결, 그리고 그 짧은 시간 속에서 나누는 삶의 진실들. 이토록 단순한 순간들이, 우리를 더 단단히 엮는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움직이며, 다시 살아감을 느낀다. 이 순간이야말로, 사랑이고, 생이고, 삶이다.


모든 위대한 것들은 언제나 아주 작은 데서 시작된다. 커다란 영감도, 긴 이야기도, 변화의 첫걸음도 처음에는 거의 알아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떨림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결국, 그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간다. 삶은 화려한 수사로 기억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조용한 손길, 가만한 숨결, 땀이 배인 셔츠 한 장, 함께 걷는 발걸음 하나에 담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삶의 미세한 결들을 들여다본다. 그 조용한 시작을 기억하고, 지금 이 작은 순간들이 언젠가 더 크고 깊은 이야기의 일부가 되리라는 믿음을 지닌 채 살아간다.


그리고 그 모든 속에서 나는 조용히 고백한다.

나는 지금, 충분히 살아 있다고.

지금 이 작은 것들이, 내 삶의 전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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