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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배우는 자전거

젊을 때 운동은 사서도 해야 한다는 말의 진실

by 아레테 클래식


지난 겨울 딸에게 자전거가 생겼다. 한 두번 타는 법을 가르쳤지만 제대로 타는 법을 완전히 익힐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중 최근, 딸아이와 함께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탄천의 물길을 따라 뻗은 자전거 도로는 마치 인생의 강줄기처럼 나를 이끌었다. 속도는 느렸고, 땀은 차올랐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운동의 감각보다 더 낯설었던 건 딸아이에게 자전거를 가르치는 ‘아버지로서의 나’였다.그녀는 처음 페달을 밟기 시작할 때,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균형을 잡지 못할까 봐 발을 떼지 못했고, 넘어질까 봐 손에 힘을 주지 못했다. 나는 옆에서 살짝 등을 밀어주며 속삭였다.


“괜찮아, 넘어져도 돼. 몸으로 배우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빠는 자전거 처음 탈 땐 어땠어? 아빠도 나처럼 이렇게 못탔어?”


그 질문에 나는 순간 멈춰 섰다. 오래전, 아주 어린 날의 기억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그날도 이런 초여름이었다. 난생처음 자전거를 탔고, 들뜬 마음에 속도를 냈다가 인도 턱에 부딪혀 넘어졌다. 무릎은 까지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나를 안아주지 않았다. 대신, 내 상처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으면 절대 안 가르쳐 줘. 그게 자전거야.”


그 말은 위로라기보단 깨달음에 가까웠다. 나는 울음을 삼키고, 다음 날 다시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넘어진다는 건, 잘못이 아니라 배움의 증거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 기억을 고스란히 딸아이에게 들려주자,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고 다시 페달에 발을 얹었다. 균형을 잡는 데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땀이 맺힌 이마 아래로 집중하는 눈빛이 반짝였다. 마침내 바퀴가 조금씩 나아가고, 그녀는 나도 모르게 웃었다. 그 순간, 나는 분명히 느꼈다. 넘어질 줄 알면서도 다시 달리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성장의 진짜 시작이라는 것을.


며칠이 지나자 자전거는 그녀에게 익숙해졌다. 속도가 붙었고, 호흡도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익숙함은 곧 경쟁심으로 바뀌었다.


“아빠, 오늘은 내가 먼저 도착할 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번개처럼 페달을 밟아 앞으로 튀어나갔다. 나는 일부러 속도를 늦췄고, 그녀가 승리의 환호를 지르길 기대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그녀는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서더니, 숨을 고르며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나 못 이기게 해? 아빠는 항상 뒤에 있어도 결국 날 따라잡잖아.”


그 말에는 단순한 불만 이상의 감정이 섞여 있었다. 나를 앞서고 싶다는 열망, 자신의 한계를 넘지 못한 좌절, 그리고 어린 자존심의 상처.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딸의 옆에 섰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오늘의 너는 어제의 너보다 더 멀리 갔어. 그게 더 중요한 거야. 아빠를 이기고 싶으면, 내일도 나와야지.”


그 말을 들은 딸은 한참을 말없이 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안장에 올랐다. 이번엔 페달을 세게 밟지 않았다. 대신 조금 느린 속도로, 무언가를 더 곱씹는 듯한 얼굴로 나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운동은 단지 체력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기는 반복의 예술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이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녀는 어른보다 더 큰 진리를 배우게 될지도 모른다.


20여분 지났을까 우리는 판교의 어느 조용한 공원에 도착했다. 주말이라 오피스 타운은 조용했고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이곳은 아이와 단 둘이 농구하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처음 공을 던진 그녀는 림 근처도 가지 못했다. 손목에 힘이 없었고, 방향도 어설펐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빠 어릴 땐 슬램덩크라는 만화가 있었어. 정대만이라는 선수가 말했지. ‘왼손은 거들뿐’이라고.”


딸아이는 그 말에 피식 웃더니, 곧바로 따라 했다.


“그럼 나도 왼손은 거들게!”


나는 자세를 천천히 가르쳤다. 어깨너비로 다리를 벌리고, 무릎을 살짝 굽히고, 손목에 스냅을 주는 방법. 몇 번이고 실패했지만, 그녀는 그날따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공이 림을 스치고 들어갔다.

그 순간, 그녀는 두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들어갔다! 아빠, 나 넣었어!”


그 말에는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자기를 믿는 자기 효능감이 서려 있었다.


“나 농구 계속할래.”


딸아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은 결국 반복의 가치를 체득하는 장이다. 그리고 그 반복을 견뎌낸 사람만이, 자신의 삶에 주도권을 갖게 된다. 우리는 함께 자라고 있다 요즘 주말마다 탄천을 달리며, 나는 느낀다. 딸아이에게 운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경험을 하고 있다.


나는 딸아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고, 슛 자세를 가르치지만, 정작 더 많은 걸 배우는 건 나다. 실패해도 다시 도전하는 그녀의 용기에서, 나는 꺼져가던 나의 열정을 되살리고, 나를 앞서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 자기 자신과 싸우는 그녀의 숨소리에서, 나는 잊고 있던 성장의 리듬을 듣는다. 농구공이 림을 향해 날아가는 그 짧은 순간, 우리는 삶을 향해 던지는 우리의 작은 꿈을 함께 보고 있다.


“젊을 때 운동은, 딸과 함께 사서도 해야 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속담은 이제 내게 이렇게 들린다.


“젊을 때 운동은, 딸과 함께 사서도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둘 다 함께 자란다.”


이 말은 단지 육체의 단련을 말하는 게 아니다.


• 실패를 견디는 심리적 내성

• 자신을 이기는 정신적 습관

• 반복에서 오는 신체-정신 통합의 성취감


이 모든 것을 딸과 함께 겪으며, 나는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탄천의 물길은 여전히 무심히 흐르고, 그 위를 달리는 자전거 바퀴는 우리의 시간 속을 굴러간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기꺼이 그 페달을 밟는다. 딸과 함께라면, 그 고생도 충분히 의미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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