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잔 제스민 차에의 초대
오랜만에 서원을 찾았다. 5월의 여백은 말 그대로 흰 꽃들로 연연하다.
불두화가 햇살을 받아 흰 눈처럼 피어 있고, 신목련은 바람에 살포시 흔들리며 은은한 향기를 수줍게 뽐내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들꽃들이 어지럽게 피어난 정원 속 시정(시의 정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눈앞에는 무심한 듯 놓인 찻잔 하나. 바람결에 실려온 제스민 차의 은근한 향기라도 맡은 듯, 나는 라이너 쿤체 시인의 시를 천천히 펼쳐 들었다.
자스민 차에의 초대(라이너 쿤체)
들어오세요,
벗어 놓으세요, 당신의
슬픔을, 여기서는
침묵하셔도 좋습니다.
이 네 줄이 나를 멈추게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시가 나를 가만히 받아주었다. 그저 눈으로 문장을 따라 읽고 있었을 뿐인데, 무언가 가슴 안쪽에서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너짐은 쓰러짐이 아니라 내려놓음이었다.
두 칸 밖에 안되는 이 작은 정자는 오랜 시간과 손때를 간직하고 있었다. 낮은 기둥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풍경이 은은히 울릴 때마다 마음 어딘가에서 메마른 감정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책장이 가득한 서원 안에는 사람의 말소리 대신 책들이 주고받는 낮은 숨결이 감돌고 있었고, 바닥에는 무심한 햇살이 스며들어 오래된 책등 위를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나는 긴 시간 동안 내 안에 말없이 쌓아둔 것들이 있다는 걸 그날 깨달았다. 말로 꺼낼 수 없어서, 혹은 누구도 그 말의 깊이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미뤄둔 마음들. 그 마음들은 마치 돌담 밑에 핀 이름 모를 꽃들처럼, 누구의 시선도 받지 못한 채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는, 그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내 마음의 구석에 조용히 들어와 말했다.
‘들어오세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더욱 깊었다.
‘벗어 놓으세요, 당신의 슬픔을.’
이보다 더 다정한 초대가 있을까. 그 순간, 내가 단지 시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의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스민 차의 향이 마음을 천천히 감싸 안았고, 따뜻한 찻잔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위로처럼 손안에 머물렀다. 말하지 않아도 좋다는 허락은, 오히려 내가 무언가를 말하게 했다. 침묵 속에서 나도 모르게 울컥 올라오는 감정들, 천천히 치유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오래된 상처들. 그 시가 없었다면 끝내 꺼내지 못했을 것들이다.
나는 그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남들에게 들킬고 싶지 않은 경험과 복잡한 감정이었지만, 그 눈물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회복의 언어였다. 바람이 불고, 꽃잎이 지고, 찻잔에서 희미한 김이 사라지는 동안, 내 마음속 상처 하나가 조용히 스스로를 감쌌다. 시인의 문장들은 마치 아주 먼 길을 돌아온 나를 반기는 집처럼,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종종 그날을 떠올린다. 책 보다 삶의 여백을 읽었던 시간. 시보다 내 마음을 더 깊이 바라볼 수 있었던 공간. 말하지 않아도 위로받을 수 있는 풍경. 그리고 그곳에 조용히 놓인 시인의 빛바랜 시집 한 권 그리고 한잔의 제스민에로의 초대. 그곳에서는 침묵해도 좋았다. 그곳에서는 나도, 내 슬픔도, 마침내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