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과 권력의 소음을 넘어

대통령 후보자 토론회를 보며

by 아레테 클래식

어제 아이들과 대통령 후보자 토론회를 보다가 불쾌함를 넘어 깊은 염증을 느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상스러운 말들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매우 저열한 행동이다. 이를 차치하고서라도 “정의”와 “국민”이라는 말을 입에 물고 서로를 악이라 단죄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한때 믿었던 도덕이 어떻게 권력의 도구로 전락하는지를 목격했다. 그들은 각기 자신이 선이라고 믿는 언어로 상대를 몰아세우고, 도덕적 정당성을 전리품 삼아 유권자의 감정을 선동했다. 그러나 그 구호와 비판의 무대는 선과 악이라는 낡은 이분법의 각본에 갇힌, 기계적인 대결일 뿐이었다. 그 속에서 인간의 고요한 본성이나 존재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정치가 도덕을 들먹일 때, 도덕은 종종 가장 부끄러운 몰골을 하고 나타난다. 나는 그토록 외쳐대는 ‘선의지’의 소란 속에서 오히려 삶의 근본적인 윤리, 조용한 존재의 윤리가 부재함을 느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잘못을 고치기 위해 ‘옳음’을 외친다. 하지만 이 외침은 자주 또 다른 폭력이 되어 되돌아온다. 도덕적 이상주의자들이 믿는 의지는 언뜻 고결해 보이지만, 그것은 종종 자신이 옳다는 신념을 절대화하면서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는 능력을 마비시킨다. 선이라 불리는 가치 판단은 약자의 복수심과 맞닿아 권력을 향한 또 다른 욕망으로 변질되곤 한다. 도덕은 언제든지 명분 아래 힘의 의지를 숨길 수 있고, 그 힘은 말보다 더 날카로운 무기가 된다. 자연의 흐름이 무익함 없이 스스로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진정한 윤리는 외부의 당위가 아니라 내면의 질서에서 피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기심은 단지 윤리적 설교로써 뿌리 뽑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의식적 본능, 생존의 충동과 맞닿아 있다. 본능은 억압보다 전환이 필요한 에너지다. 억제된 욕망은 더 왜곡된 형태로 표출되며, 때로는 폭력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이기심을 단지 악으로 규정하고 단속할 때, 오히려 그 욕망은 더 깊은 그림자 속에서 자란다. 이는 욕망을 억누를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고친다’는 말조차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세상은 기계처럼 고장 난 부품을 교체하면 되는 대상이 아니다. 세상은 인간의 욕망이 무의식적으로 투사된 거대한 화면이며, 우리가 보는 현실은 진리라기보다 욕망이 그려낸 해석에 가깝다. 인간의 행위조차 자연의 필연 속에 놓여 있는 것이라면, 세상을 바꾸는 일은 외부 구조의 혁신이 아니라, 욕망을 해석하는 방식의 전환이어야 한다. 억제의 윤리가 아니라, 창조적 해석의 윤리가 필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욕망을 지향해야 하는가? 그것은 존재의 충만함을 향한 무심한 열망이다. 소유하거나 지배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고유한 가능성을 꽃피우려는 몰입에서 비롯된 에너지다. 이는 외적인 성과나 칭찬을 전제로 하지 않고, 오히려 내면 깊숙이 솟아나는 생명력에 가깝다. 그러한 삶을 사는 이는 타자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완성시키려 하며, 자기 존재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존재의 욕망은 현대 사회의 구조 속에서 쉽게 솟아오르지 않는다. 외부의 명령과 비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외적인 기준에 따라 평가되고 조정된다. 이 과정에서 내면의 목소리는 묵살되고, 존재의 욕망은 침묵 속에 파묻힌다. 그러나 진정한 욕망은 오직 고요함 속에서 자라난다. 화려한 연단이 아니라, 내면의 침묵이야말로 삶의 방향을 들려주는 진실의 장소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도덕과 경제가 다투는 광장을 떠나야 한다. 그 소란을 비켜나 조용히 자기 존재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나오는 힘을 따라 사는 삶은 더 이상 타자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자유다. 그것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필연성을 살아내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방식이다. 도덕이 실패한 자리에, 존재가 솟아오른다. 선과 악의 이분법에 얽매이지 않고, 그 속에 숨겨진 권력의지를 의심하며, 오직 자기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말소리를 듣는 삶. 이것은 더 이상 세상을 바꾸겠다는 전투적 선언이 아니라, 조용히 피는 꽃처럼 자신을 완성시키는 존재의 혁명이다.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한다. 진정한 변화는 누가 더 선한가를 외치며 목소리를 높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 명분으로 상대를 누르려는 격정, 정의라는 이름 아래 던져지는 감정의 폭력은 결코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적 욕망을 억압하고, 무의식 속에 웅크리게 만들었을 뿐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그런 소란의 사회가 아니다. 우리가 정말 바라는 공동체, 경제적으로 가난하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행복한 사회는 오히려 조용한 정신문화의 생활화에 있다. 고요함 속에서 되살아나는 본성의 힘이야말로, 진정한 변화의 출발점이다.


자유란 외부 명령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이다. 진리는 누군가의 선언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스스로 발견되어야 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윤리는 선한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조용히 피어나는 윤리여야 한다. 그것이 창조적인 삶이며, 기쁨이 윤리로 승화되는 길이다.


본능과 욕망은 무조건 억제할 것이 아니라, 다듬고 방향 지어야 할 자연의 힘이다. 그 본능이 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내면의 정신이 단단해야 하며, 이 정신은 오직 고요함을 통해 길러진다. 고요한 마음은 다투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다. 그 고요 속에서야 비로소 인간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욕망은 억눌러 없앨 것이 아니라, 관조하고 돌려주어야 할 대상이다.


고요해지면, 우리는 모두 쓸모 있는 존재가 된다. 이때 말하는 쓸모란 효율이나 생산성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서의 가치다. 그것은 타인에게 자신의 충만함을 나누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며, 바로 그곳에서 새로운 사회가 시작된다. 투쟁의 사회가 아니라, 창조의 공동체.


우리는 이제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도덕적 이상주의와 경제적 이기주의가 서로를 반사 거울처럼 재현하며 끊임없이 소음을 내는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고요한 존재가 다른 존재의 고요함을 깨우는 방식으로. 더 나은 세상은 외침 속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도덕이라는 이름의 싸움에서 벗어난, 존재 자체가 윤리가 되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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