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 사진 앞에서
오늘은 이상하게도 이른 새벽에 잠이 깼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고, 거실은 고요했다. 세상이 숨을 죽인 듯, 오직 나만 깨어 있는 시간. 나는 물을 끓여 따뜻한 찻잔을 들고, 소파에 조용히 앉았다. 책 한 권을 꺼내 펼쳤다. 야스퍼스. 철학자의 문장들은 새벽의 적막 속에서 유난히 깊게 가라앉았다.
“청년 시절의 활기찬 아름다움은 점점 사라집니다. 그러나 일생을 함께하는 사람에게는 실존적으로 아로새겨진 노년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나는 이 문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문장은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선은 거실 선반 위의 액자에 닿았다. 그 속엔 20년 전, 우리가 신혼여행에서 찍은 사진이 담겨 있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나이키 상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싸우고 찍은 사진이라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관람보다는 사진 찍는 일에 열심히라며 아내가 화가 났다. 신혼여행 가서 처음 싸운 사진이 이렇게 평생 우리의 결혼을 기념하고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세상의 시간들이 아직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알지 못했던 그 시절의 기운을 담은 채.
20년이라는 시간. 그것은 단지 긴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그건 서로를 닮아가는 과정이었고, 서로를 이해하며 포기하고, 배려하며 성장하는 시간이었다. 우리의 사랑은 소리 없이 나이 들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단단했다. 눈부시지 않았지만 따뜻했다.
우리는 함께 여러 겹의 계절을 지나왔다.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그 숨 가쁜 기쁨, 아이의 열에 밤새워 찜질하고 식은땀을 닦아내던 밤, 다시 두 아이의 입학식, 졸업식, 사춘기, 작은 일로 싸우고, 말없이 풀려나던 수많은 날들.
함께 보낸 시간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그건 어느새 우리의 눈빛에, 말투에, 손짓에 스며들어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랑해”라는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서로를 너무 잘 안다. 이제는 “괜찮아”라는 말이 오히려 더 깊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다.
“여인은 나이가 들면서 더 아름다워집니다. 하지만 그 여인을 사랑하는 사람만 그 아름다움을 봅니다.”
나는 이 말을 나이가 들수록 더 실감한다. 당신은 젊었을 때도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주름이 조금씩 늘어난 얼굴 위에는 인내와 배려로 쌓은 시간이 새겨져 있다.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이 ‘자연의 선물’이었다면, 지금의 아름다움은 당신이 ‘시간과 삶으로 직접 만든 예술’이다.
그녀는 매일 가족의 끼니를 준비하고, 지친 나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이고, 힘든 아이들을 말없이 안아주는 손길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의 눈가는 웃음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삶이 힘들어도 여전히 따뜻하려 애쓴 당신의 시간, 그것이 바로 내가 매일 새롭게 발견하는 아름다움이다.
사람들은 자주 말한다. “결혼은 힘들다.” “가족은 숙제다.” 그리고 너무도 쉽게, 그 숙제를 내려놓는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진짜 사랑은 불꽃이 아니라, 불씨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결혼은 불완전한 두 사람이 매일 조금씩 자신을 내려놓으며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완벽한 날은 없지만, 서로를 품는 연습은 매일 이어진다.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살아낸 사람’이 되어간다.
그것이 노년의 아름다움이다. 주름과 흰머리, 느린 걸음과 잦은 잊음 속에서도 “그래도 난 여전히 네 옆이 좋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누구보다 나를 많이 보고, 많이 실망했지만, 그래도 나를 믿고, 다시 안아주는 사람. 그런 사랑은, 시간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사진을 다시 제자리에 놓으며, 나는 조용히 웃었다. 20년 전 그 다툼이, 그저 험난할 결혼 생활의 서곡이었다면 지금의 웃음은 지나온 시간을 품은 연민과 감사다.
나는 야스퍼스의 책장을 다시 넘긴다. 이른 새벽은 이제 점점 아침의 빛을 데리고 온다. 주방에 불이 들어오고, 익숙한 발소리가 들린다. 당신이 일어난다. 나는 오늘도 당신에게 “좋은 아침”이라 말할 것이다. 그 안에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20년의 기억이 담겨 있다. 그리고 언젠가, 더 늙고 느린 우리가 서로를 부를 때— 아마 나는 오늘 이 새벽을, 그 사진을, 이 따뜻한 찻잔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당신과 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단지 시간이 흐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내가 누군가와 온전히 살아냈다는 증거이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내 곁에 있을 단 한 사람의 이름이다. 이 얼마나 심오한 사랑인가. 그리고, 이 얼마나 단단한 아름다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