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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해의 언어를 배워야 할 때

선거 이후, 통합으로 나아가기 위해

by 아레테 클래식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제21대 대통령 취임선서를 한 뒤, 국회 청소 노동자와 방호 직원부터 만나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는 청소 노동자 한 분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 단 한 장의 사진이 남긴 여운은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의전이 아니었고, 기획된 연출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치가 다시 사람을 향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선언이었으며, 통합이란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선거가 끝났다.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침묵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분노한다. 정치란 본디 치열한 것이다. 그러나 그 치열함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 치열함 이후에도 서로를 사람으로 존중할 수 있느냐가 문명의 시험대다. 우리는 지금 그 시험대 앞에 서 있다. 그리고 이 시험은 단순히 정치적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회를 꿈꾸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선거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논쟁은 토론이 아닌 증오의 무대가 되었고, 비판은 비난을 넘어 인신공격으로 흘렀다. 누군가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관계가 끊기고, 가족 사이에도 벽이 세워졌다. 정치적 견해의 차이는 인간성의 차이로 해석되었고, 다름은 곧 적대의 표식이 되었다. 이는 민주주의가 꿈꾸던 다원성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모습이다.


문제는 단순히 말의 수위나 감정의 과잉이 아니다. 그 이면에 놓인 흑백 논리의 폭력성, 진영 논리의 독선성, 그리고 절대적 가치 판단에 대한 맹신이 근본 원인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너무 쉽게 누군가를 ‘옳다’ 혹은 ‘그르다’로 분류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나뉘지 않는다. 하나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해서, 그 입장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정책이나 발언에 반대한다고 해서, 그 반대자가 전체적으로 그릇된 사람일 수는 없다. 맥락 없이 ‘이것은 절대선이고, 저것은 절대악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복잡한 현실을 단세포적으로 해석하는 오류에 빠진다.


‘저것’이 생겨난 데는 반드시 ‘이것’이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가 멀리하려 했던 정치 세력, 우리가 비난했던 이념도 실은 우리 사회 내부의 긴장, 결핍, 그리고 욕망 속에서 자라난 것이다. 우리는 그 모든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기 전에, 그것이 왜 생겨났는가를 묻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그것이 이해의 시작이다.


생각이 단순할수록 선동가는 쉽게 힘을 얻는다. 그는 감정의 언어로 세상을 나누고, 간단한 구호로 복잡한 현실을 재단한다. “우리가 정의다.” “그들은 악이다.” 이 단순한 구분이 대중의 분노를 결집시키고, 타인을 향한 혐오를 정당화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철학이 말문을 닫고, 문학과 예술은 조롱당하며, 사유는 추방된다. 결국 우리는 ‘질문 없는 사회’, ‘성찰 없는 분노’만이 남은 공동체 속에 살게 된다.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갈라놓는 그 사고방식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독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우리가 순수한 가치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해질수록, 역설적으로 그 가치는 타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의 도구가 되기 쉽다. “어떻게 이 정의로운 싸움에 동참하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어느새 “저 사람은 불순하다”, “저 사람은 부도덕하다”는 비난으로 바뀌고 만다. 그렇게 우리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편을 판단하며, 편으로 인간을 환원한다. 하지만 편은 인간을 모두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다. 그릇이 작을수록,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을 버리게 된다. 그 버림은 바로 혐오가 된다.


세상을 흑백의 감정으로만 읽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세상을 갈라놓는다. “우리”와 “그들”, “순수”와 “불순”, “옳은 사람”과 “틀린 사람”. 그 이분법적 언어는 점점 더 현실을 왜곡하고, 점점 더 대화를 어렵게 만든다. 진실이 침묵하고, 증오가 목소리를 낼 때, 우리는 무언가를 잃는다. 그것은 공동체의 윤리이자, 인간에 대한 예의다.


하지만 그 어떤 사회도 편 가르기로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분열은 정치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며, 결국은 삶의 기반 자체를 갉아먹는다. 선거 이후, 우리는 다시 하나의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 정책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정책이 누구의 삶을 겨누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진영을 떠나, 서로의 불안과 상처를 듣는 태도부터 시작해야 한다. 바로 그 자리에서 민주주의는 다시 살아난다.


이해는 동의와 같지 않다. 이해한다는 것은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존재를 존중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가장 시급히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 이해의 언어다. 선거는 끝났지만, 사회는 계속된다. 이제는 ‘누가 옳았는가’를 따지기보다,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그것이 통합의 출발점이며, 민주주의의 깊은 뿌리를 다시 내리는 길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노의 언어가 아니라 이해의 언어다. 감정적 흑백 심리에서 벗어나, 복합적인 현실을 전체로 바라보는 지혜. 우리는 그 지혜를 통해서만, 진정한 공동체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우리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삶의 진실에서 출발한다. 세상의 균은 결코 완전히 소탕되지 않는다. 완벽히 무균한 존재는 없다. 건강한 사람은 무균자가 아니라 보균자다. 몸속에 늘 병원체를 지닌 채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병원체의 유무가 아니라, 그것과 어떻게 공존하며 스스로를 돌보는가이다. 진짜 건강한 사람은, 자기 안의 병을 외면하거나 타인에게 투사하지 않고, 조용히 자기 몸을 살피는 사람이다.


정치도, 사회도, 마찬가지다. 완전히 순수한 진영, 완전히 정의로운 목소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진영은 각자의 욕망과 한계를 안고 있으며, 어느 쪽도 절대적 선도 절대적 악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를 악으로 몰아붙이는 흑백 프레임이 아니라, 서로 다른 병원체를 품은 채로 공존하려는 건강한 사회적 면역 체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다른 기준을 세워야 한다. 누가 더 순수했는가, 누가 더 정당했는가를 따지기보다, 누가 이 복잡하고 병든 구조 속에서 우리 모두를 편 가르지 않고 더 잘 보살피려 했는가를 기억해야 한다. 그가 바로 우리가 길러야 할 리더의 모습이며, 그런 태도를 지닌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마땅히 영웅으로 존중해야 할 사람이다.


이제는 갈라진 말이 아니라 연결하는 말이 필요하다. 혐오가 아니라 보살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보살핌은 완벽함에서 오지 않는다. 불완전함을 끌어안고, 서로를 돌보려는 그 태도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바로 그 태도를, 우리는 한 장의 사진에서 보았다. 대통령 선서식날, 가장 먼저 청소 노동자와 방호직원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전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 사회도 이제, 그 길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첫걸음을 내디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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