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을 산책하며
저녁이 산 위로 내려앉는다.
하루의 무게가 나뭇잎에 스며들고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느리게 흔들린다.
남한산성.
돌과 돌 사이로 바람이 지난다.
말없이, 그러나 오래도록 무언가를 지켜온 몸짓으로.
나는 오늘, 동생과 함께 걷는다.
운동을 가르치는 그는,
몸의 기억이 어떻게 시간을 이기는지를 안다.
나는 글을 쓴다.
말의 리듬이 어떻게 마음의 틈을 채우는지를 배운다.
반복은 무너짐을 견디는 예술이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고
닳아지면서도, 본모습을 잃지 않는 일.
지속한다는 것.
그건 어떤 위대한 결심이 아니라,
오늘을 포기하지 않는 조용한 선택이다.
그 순간, 스승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괴테의 문장을 평생 번역하신 분.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초인적인 힘으로 수많은 작품들을 번역하고 계신다.
나는 그 긴 겨울을 떠올린다.
해도, 바람도, 누구의 관심도 없이
오직 자신만의 계절을 견딘 시간.
성벽을 따라 걷다가,
산 아래 불빛을 본다.
도시의 숨결, 사람들의 하루가
저마다의 언어로 반짝인다.
불빛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저녁, 한 사람의 자리.
그들도 아마 우리처럼
지켜야 할 무언가를 품고 있을 것이다.
남한산성은 말이 없다.
그러나 오래된 것들은 그렇게 말이 없어도
충분히 깊다.
수많은 계절을 견딘 자리에 서서,
그저 조용히 존재하는 것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삶.
운동도 글쓰기도
무리한 변화보다 중요한 게 있다.
조금씩, 매일.
무너지지 않을 만큼만 계속하는 것.
나는 속으로 되뇐다.
글도, 삶도, 사랑도
결국엔 그 말 안에 있다.
지속하는 자만이 도달하는 곳이 있다.
오늘의 걸음이 작더라도,
그 걸음만이 열 수 있는 문이 있다.
밤이 깊어지고
우리 그림자가 산길을 따라 내려갈 때,
남한산성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것,
무너지더라도 다시 세워지는 것,
그런 마음 하나, 그 믿음 하나로
우리는 살아간다.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우리도 하나의 성곽으로 남을 수 있을까.
말없이,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는 존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