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애, 괴테, 그리고 여백서원
어떤 작품은 한 인간의 생애보다 길다.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쓴 작품이 있고, 또 그 문장들을 온 생애를 걸어 옮긴 이가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게 『파우스트』는 그런 작품이었다. 그리고 전영애 교수에게도 그랬다. 『파우스트』는 괴테가 25세에 집필을 시작해, 생애 마지막 해인 82세에 2부를 완성한 대작이다. 그 60년은 단지 창작의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한 성찰과 탐구의 기록이었고, 그 거대한 여정은 한국의 한 번역가를 통해 다시 살아났다.
그 이름이 바로 전영애. 서울대학교 독문과 명예교수이자, 2011년 바이마르 괴테 학회에서 ‘괴테 금메달’을 받은 세계적인 괴테 연구자다. 그녀는 무려 40년간 『파우스트』를 붙잡고 살아왔다. 문장을 옮기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며, 괴테가 흘린 시간을 그녀도 고스란히 흘려보냈다.
그녀에게 번역은 단순한 언어의 이해나 전달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감이었고 동행이었다. 괴테의 문장 하나하나를 우리말의 숨결로 되살리는 작업은 삶의 가장 고요하고도 치열한 항해였고, 인간을 향한 신뢰와 사유에 바탕을 둔 깊은 정신의 노동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 긴 항해를 버텨낸 데는, 문학에 대한 열정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근저에는 조용히 곁을 지켜준 두 사람, 바로 부모의 사랑이 있었다.
‘여백서원’—전영애 교수가 지은 여주에 위치한 서원의 이름이다. 글 한편 쓸 개집만 한 집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면 그녀의 오랜 꿈이 씨앗처럼 퍼져 이제는 세상의 많은 이들을 품어낼 큰 여백이 되었다. 이 단정한 이름 속에는 한 생애를 관통한 기억과 존경, 그리고 사랑이 담겨 있다.
‘여백(餘白)’은 그녀 아버지의 호였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온 아버지의 맑은 인품을 본 친구들이 지어준 이름. ‘맑은 흰색’처럼, 군더더기 없이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비워내며 타인을 위해 살아간 숭고한 부친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딸은 그 이름을 자신의 서원에 붙였다. 자신의 학문이 아버지의 삶처럼 정갈하고 맑게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녀는 이런 아버지의 뜻을 기려 여백서원 대들보에 이렇게 썼다.
여백을 위하여 爲餘白
시를 위하여 爲詩
후학을 위하여 爲後學
그녀가 산기슭에 서원을 짓겠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은 걱정 섞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허벌판의 깊은 산속에 서원을 짓고 정원을 만들겠다는 계획은 비현실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말없이 당신의 전 재산과도 같은 돈을 내어주셨다. 그 선택은 단지 경제적 후원이 아니라, 평생을 자린고비로 살아온 이가 내린 큰 결단이었다. 스스로를 위해서는 한 푼도 아끼며 살아온 분이, 오직 딸이 믿는 ‘학문의 길’에 모든 것을 내어준 것이다. 그녀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파우스트』에도 나오는 구절입니다. 사람을 마지막 실족에서 물러서게 하는 것, 마지막 걸음을 못 내딛게 하는 것은… 유년 시절의 사랑의 기억이에요.”
그 기억은 그녀의 글 속에 흐르고, 정원 위에 피어나며,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조용히 살아났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를 평생 잊지 못한다. 종갓집에 시집와 한평생 묵묵히 가정을 돌보며 살아온 어머니. 고단한 삶 속에서도 자식 앞에서 한 번도 비굴하거나 속된 말을 하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오히려 늘 단 하나의 문장을 되뇌셨다.
“사람이 글 배웠으면 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 말은 그녀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윤리였다. 괴테가 말했듯, 지식만으로는 인간을 완성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도 ‘앎’보다 ‘삶’을 먼저 고민하며 글을 써왔다. 그녀에게 『파우스트』는 단지 문학이 아니라, 철학이었고 윤리였으며, 사랑의 실천이었다. 그녀의 문장은 그렇게 고요히, 단단해졌다.
정원을 가꾸는 번역가, 여백서원이라는 사유의 공간 2004년, 경기도 양평 깊은 산속. 전영애 교수는 직접 ‘여백서원’을 짓는다. 그 이름은 아버지의 호이자, 두 부모의 삶을 기리는 기념비였다.
그녀는 서원을 둘러싼 1만 제곱미터의 넓은 정원을 직접 가꿨다. 나무 한 그루, 돌 하나에도 의미를 심었다. 누군가는 한 평의 땅을 얻기 위해 평생을 살지만, 그녀는 한 문장을 번역하며 평생의 정원을 만들어냈다.
그곳은 단지 번역의 공간이 아니었다. 정신의 안식처, 문학의 신전, 그리고 인간을 위한 자리가 되었다. 그녀는 여백서원 근처에 ‘괴테마을’이라는 이름의 공간을 만들었고, 그곳에서는 시 낭송회와 독서 모임, 강연과 음악회가 열린다. 괴테의 정신이 머물며 한국어로 피어나는 자리. 그녀의 정원은, 세상을 위한 열린 여백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영애 교수가 완역한 『파우스트』가 출간되었을 때, 문학계는 술렁였다. 괴테의 언어가 한국어로 숨을 쉬게 된 것이다. 그것은 단지 번역의 성과가 아니라, 한 인간의 인생이 한 작품을 통해 다시 태어난 기적이었다.
그 번역은 언어의 옮김이 아니라, 생애의 총합이었다. 그것은 부모가 준 사랑의 기억, 인간에 대한 믿음, 학문에 대한 경외가 빚어낸 아름다운 결실이었다.
괴테는 『파우스트』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더 밝게! 더 밝게!(Mehr Licht!)”
죽음을 앞둔 괴테의 마지막 외침이자,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삶의 요청이었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통해 던졌던 질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그 물음은 지금도 살아 있다. 그 답은, 때로 한 문장 속에, 한 정원 안에, 혹은 어떤 생애의 고요하고 단단한 숨결 속에 숨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여주 산기슭의 ‘여백서원’이라는 이름의 정원에서, 그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그 고요한 감동 앞에서, 나도 다시 묻는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또 어떻게 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