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

카뮈와 함께 보는 『인생은 아름다워』의 부조리와 선택

by 아레테 클래식

프롤로그: 한 편의 영화, 한 시절의 기억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재개봉한다. 스무 살의 봄, 캠퍼스의 은행나무 그늘 아래에서 나는 사랑, 삶과 죽음에 대해 묻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그 시절, 아는 선배가 내게 말했다. “『인생은 아름다워』를 꼭 보라”고. 영화가 인생을 설명해주진 않겠지만, 인생이 설명되지 않는 이유를 느낄 수 있다고.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이후로 나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보았다. 도라가 비를 맞으며 자전거에 타는 장면, 귀도가 죽음을 향해 걸어가며 아들을 향해 윙크하는 장면—그 모든 것이 한 편의 시처럼 남았다. 삶은 설명되지 않았고, 세상은 논리로 맞춰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영화는 나에게 어떤 ‘감각’을 남겼다. 바로 언젠가 이 감각, 이 ‘삶의 무게를 웃음으로 견디는 감각’을 글로 옮겨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고, 나는 이제 다시 『인생은 아름다워』를 꺼낸다. 단지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한 시절의 기억이자 직관으로 남은 그 장면들을 카뮈와 함께 다시 본다. 삶은 여전히 설명되지 않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제, 영화 속 부조리와 삶의 선택, 그리고 웃음이라는 철학적 저항의 의미를 하나씩 되짚어보려 한다. 그때의 나처럼, 지금의 나도 여전히 묻는다.


“삶은 정말 아름다운가?”


1. 카뮈의 물음: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알베르 카뮈는 『시지포스 신화』의 첫 문장에서 이렇게 썼다.


“유일하게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자살이다.”


이 충격적인 선언은 단지 죽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삶이라는 문제를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되묻기 위함이다. 세계가 인간의 의미 추구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사실, 즉 인간 존재와 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불일치—이것이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이 철학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귀도는 유쾌하고 낙천적인 인물이다. 그는 삶을 향해 끊임없이 웃고 농담을 던진다. 하지만 그의 삶은 이탈리아의 반유대주의, 파시즘, 그리고 결국 강제수용소라는 절대적인 폭력으로 무너진다. 그럼에도 그는 아들에게 말한다.


“이건 아주 특별한 게임이야. 1000점을 모으면 탱크를 타고 집에 갈 수 있어.”


귀도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삶을 고의적으로 ‘농담’으로 바꾼다. 그는 세계가 비합리적임을 알면서도, 그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의미의 방식으로 다시 구성한다. 이것이 바로 카뮈가 말한 ‘부조리한 삶에의 긍정’이며, 그 핵심에는 다음 질문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귀도는 이 질문에 단호하게 “예”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것을 말이 아니라, 삶 자체로 증명한다.



2. 우연과 유머: 부조리와 처음 만나다


영화의 초반부는 동화 같다. 하늘에서 공주가 떨어지고, 우연이 인연을 만든다. 도라와의 만남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전설적이다. 그러나 이 과장된 로맨틱함은 단지 사랑 이야기의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얼마나 무작위적이고 통제 불가능한지를 보여주는 철학적 알레고리다.


카뮈는 부조리를 “우주의 침묵과 인간의 갈망 사이의 충돌”이라 했다. 귀도는 그 침묵을 관조하지 않는다. 그는 그 침묵을 농담으로 가르고, 우연을 자기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는 연속된 사건들의 의미를 붙잡지 않으려 한다. 대신 그는 그것들을 즐긴다.


귀도: “봉! 하늘에서 떨어진 공주님이 나타났군요!”


이 한마디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그것은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의 깨달음 이후의 태도—‘자기 결단’의 시작이다. 그는 세계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 앞에서 마비되지 않고, 웃음을 선택한다.


유머는 회피가 아니다. 그것은 저항이다. 학교에서 파시즘의 우생학 강의가 펼쳐지는 동안, 귀도는 자기가 가장 완벽한 ‘아리아인’이라며 몸을 우스꽝스럽게 드러낸다. 그는 체제에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체제 자체를 희화화함으로써 세계의 권위적 구조를 해체한다. 웃음은 칼보다 날카롭다. 왜냐하면 웃음은 체제를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웃음은 그 체제를 말이 안 되는 것으로 만든다. 그것이 바로 부조리 앞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첫 번째 자유다.



3. 부조리의 삶: 세계는 말이 되지 않는다


귀도의 세계는 코미디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세계가 얼마나 ‘코미디 같지 않게’ 움직이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이탈리아 사회는 점점 전체주의의 그림자에 물들어간다. 그러나 귀도는 여전히 현실을 웃음으로 받아친다.


“제 다리는 1.2미터입니다. 귀도는 초인종입니다.”


이 대사는 체제의 언어를 따라가면서도 그 언어의 무의미함을 드러내는 저항이다. 귀도는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스템이 왜 말이 되지 않는지를 폭로한다. 그 방식은 유쾌하지만, 내용은 치명적으로 진지하다.


카뮈는 말한다.


“부조리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질 때, 그것은 반항이 된다.”


귀도의 농담은 행동이다. 그는 전투적인 혁명가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삶을 살아낸다. 그의 유머는 자기기만이 아닌, 자기 인식에 기반한 창조적 태도다. 그는 세계에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그 절망을 웃으며 견딘다.


4. 사랑이라는 의미 만들기: 도라와의 결혼


도라와 귀도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질서에 대한 반항이며, 제도에 대한 거부다. 도라는 귀도의 유대인이라는 배경과 사회적 위치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선택한다. 사회적 신분, 종교, 계급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귀도라는 인간을 선택한다.


결혼식의 형식은 없다. 대신 도라는 비를 맞고 자전거에 타며, 귀도와 함께 도망친다. 이 장면은 실존주의적 자유의 선언이다. 세계는 억압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이 자유다. 그리고 그 자유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강력하게 나타난다.


귀도: “나는 도라를 훔쳤어. 그런데 그녀도 나를 훔쳤지!”


서로가 서로를 훔치는 이 장면은 단순한 사랑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무의미한 세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가 되겠다는 실존적 맹세다. 사랑은 세계의 불확실성을 잠시 멈추는 인간의 방식이다. 그것은 영원하지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절대적이다.


5. 현실의 균열: 수용소로 가는 기차


기차는 영화의 톤을 완전히 바꾼다. 갑작스럽고 설명 없이, 모든 것은 무너진다. 세계는 더 이상 유쾌한 코미디가 아니다. 이제 그것은 가장 잔인한 현실, 인간이 가장 쉽게 파괴될 수 있는 체제의 얼굴을 드러낸다.


도라: “내 남편과 아이가 갔습니다. 나도 따라가겠습니다.”


이 선택은 윤리적 반란이다. 그녀는 두려움보다 사랑을 선택한다. 이것은 감정이 아닌 윤리다. 실존주의는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선택과 책임을 강조한다. 도라는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자신의 삶의 중심을 ‘사랑’이라는 가치로 재정의한다. 이것이 『반항 인간』이 말하는 윤리적 실존주의다.


기차는 물리적으로는 수용소로 향하지만, 철학적으로는 인간 실존의 경계로 향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귀도의 윤리는 더욱 명확해진다.


6. 이야기라는 무기: 게임으로서의 현실


수용소에서 귀도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 거짓은 진실 이상의 윤리를 담고 있다. 그는 아들에게 현실을 꾸며 말한다. 그 꾸밈은 자기 보호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책임의 서사다.


카뮈는 『시지포스 신화』에서 ‘도피’를 경계했다. 신, 종교, 허구적 체계는 인간을 현실에서 멀어지게 만든다고 보았다. 그러나 귀도의 이야기 전략은 그와 다르다. 그는 거짓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통해 현실을 감당한다. 그는 이야기로 아들을 보호하며, 이야기로 현실을 재구성한다.


이것이 바로 ‘반항 인간’의 윤리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계에 저항한다. 귀도의 이야기는 허구이지만, 그 허구는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7. 죽음 속의 유머: 총살 전날의 행진


귀도는 붙잡힌다. 이제 그의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의 눈앞에서 웃는다. 그는 철창 너머의 조슈아에게 어색한 군인 행진을 한다. 죽음 앞에서도 그는 놀이의 규칙을 어기지 않는다.


“우리는 시지포스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 한다.” — 카뮈


귀도는 죽음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유로운 인간으로 존재했다. 이는 카뮈의 윤리와 완벽히 부합한다. 삶이 무의미하고 죽음이 필연적이라면,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자유는 태도다.


귀도는 웃으며 죽음을 맞는다. 그것은 삶을 조롱한 웃음이 아니라, 삶을 끝까지 긍정한 웃음이다. 그것은 시지포스의 웃음이다.


8. 조슈아의 증언: 사랑의 기억이 남는다


해방의 순간, 조슈아는 진짜 탱크를 타고 나온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다. 그가 간직한 것은 아버지의 이야기, 아버지의 유머,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건 내가 아버지와 함께했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야.”


귀도는 죽었지만, 실패하지 않았다. 그는 절망을 물리치지 않았지만, 절망 속에서도 삶의 아름다움을 남겼다. 그것은 영웅적인 승리가 아니라, 인간적인 증언이다.


사랑은 죽지 않는다. 기억은 고통을 견디게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도 삶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증거가 된다.


9. 시지포스의 윤리: 살아내는 것 자체가 반란이다


카뮈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되, 그 무의미를 견디고 살아내는 것이 인간의 윤리라고 했다. 귀도는 바로 그 윤리를 실천했다.


그는 위대한 말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혁명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삶의 방식’을 증명했다. 웃음, 사랑, 유머, 이야기—이 모든 것이 귀도의 바위였다. 그는 그것들을 끝까지 밀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다워.”


귀도는 그렇게 증언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영화 속 메시지가 아니라, 우리가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제안이다.



나가며: 귀도의 윙크, 우리를 향한 시지포스의 웃음


귀도의 마지막 윙크는 단지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신호다.


“나는 너희가 말하는 질서와 공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나의 방식으로, 나의 웃음으로 이 바위를 다시 민다.”


그는 죽음을 이기지 못했지만, 죽음에 패배하지도 않았다. 그는 끝까지 인간이었고, 끝까지 자유로웠다. 그의 웃음은 저항이자 긍정이며, 침묵하는 세계를 향한 마지막 메시지다. 귀도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당신의 바위를 밀고 있는가?”


우리는 그 질문 앞에서 다시 시지포스를 상상하게 된다. 그는 웃으며 바위를 민다. 귀도처럼.


참고 문헌

알베르 카뮈, 『시지포스 신화』, 열린책들, 2008.

알베르 카뮈, 『반항하는 인간』, 열린책들, 2009.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è Bella), 1997,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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