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권력, 그리고 인간의 예속
영화 ⟪신명⟫과 스피노자: 신이라는 이름의 예속
들어가며: 신과 권력, 그리고 인간의 예속
오늘은 대통령 선거일이다. 이 중요한 날을 기념하며 영화 ⟪신명⟫을 관람했다. 이 영화는 현대 사회에서 벌어진다는 것이 믿기 힘든 한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여전히 ‘신’이라는 이름에 얼마나 깊이 사로잡혀 있는지를 드러낸다. 어린 시절 분신사바로 시작된 주술적 세계에 심취한 윤지희(김규리 분)는, 남성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는 법을 배우며 점차 자신의 삶 전체를 위조하기 시작한다. 얼굴, 이름, 학력, 신분… 그녀는 철저히 ‘새로운 자아’를 창조하며 사회의 중심부로 파고든다. 그러던 중 권력의 맛을 본 그녀는 “대한민국을 손에 넣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주술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생명까지 조종하려 든다.
정현수 PD(안내상 분)와 탐사보도 기자들은 대선 후보 김석일과 그녀 사이에 얽힌 수상한 연결고리를 추적한다. 그리고 이들은 점점 더 위험한 실체, 즉 “신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된 사적 욕망의 시스템”에 접근하게 된다. 영화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라, ‘미신, 권력, 인간’의 삼각관계가 어떤 사회적 재앙을 낳는지에 대한 거대한 우화이다.
나는 오늘 스피노자의 철학을 통해 이러한 문제의식을 조명해 보려 한다. 그에 따르면 신은 자연 그 자체이며, 인간이 자기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을 인격화하고 목적론적으로 해석할 때, 비로소 미신이라는 환상이 태어난다. 그리고 이 미신은 정치와 권력을 통해 조직화될 때 더욱 위험해진다. ⟪신명⟫은 바로 이 지점—신을 만든 인간이 신에게 예속되는 비극의 구조를 이야기한다. 윤지희는 신을 조작했다고 믿지만, 실상 그녀 역시도 신이라는 이름에 자신의 삶을 종속시킨 존재일 뿐이다.
이 에세이는 영화 ⟪신명⟫을 통해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가 말한 미신, 예속, 자유의 문제를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나는 이 글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신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책임으로 이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가?
목적 없는 자연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능력을 주체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미신과 예속을 넘어, 참된 자유와 자기 인식을 향한 철학적 여정의 출발점이다.
1. 스피노자의 미신 비판: 인간 중심의 “목적적 세계관”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자연 현상을 자기중심적 목적론에 따라 해석한다고 본다. 즉, 인간은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을 중심으로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을 갖는다. 예를 들어:
* 비가 오는 이유는 인간에게 곡식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이다.
* 태양은 인간에게 빛과 온기를 주기 위해 떠오른다.
* 동물은 인간의 먹이로, 식물은 인간의 약초로 존재한다.
이러한 신념은 자연 만물의 존재 목적이 인간의 유익이라는 착각을 낳고, 나아가 신조차 인간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인격적 존재로 왜곡된다. 신은 마치 인간의 삶을 지켜보고, 상과 벌을 주며,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처럼 상상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단언한다.
“모든 목적은 인간의 허구에 불과하며, 자연은 목적 없이 존재한다.”
자연은 신의 ‘표현’이자 ‘자기 전개’(Natura naturans)이며, 인간 역시 이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인간은 특권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법칙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목적론적 세계관은 인간의 오만함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으며,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러한 생각이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에티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야 함을 시사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그것에 순응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2. 왜 인간은 미신을 만들어내는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불안을 느끼며,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신화적 서사와 목적론적 해석을 만들어낸다. 이 해석은 신이 인간처럼 사고하고 판단하는 존재라는 상상을 기반으로 하며, 결과적으로 신은 인간의 욕망과 공포가 투사된 가상의 이미지가 된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자신처럼 사고하고 판단하는 어떤 존재—곧 신—을 상상함으로써 안도감을 얻는다.”
이러한 인식의 전도는 인간의 감정이 인식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만들고,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무지를 신이라는 형상으로 외화하게 만든다. 결국, 미신은 자기 무지에 대한 보상이며, 무력감의 신학적 환상이다.
이러한 미신은 인간의 감정, 특히 두려움과 희망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감정은 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감정이 인간의 이성을 흐리게 하고, 미신에 빠지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두려움은 인간이 신을 상상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감정이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이러한 감정을 극복하고, 자연의 법칙을 이해함으로써 미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이성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3. 권력자와 미신: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무지의 제도화
여기서 스피노자의 비판은 단지 개인의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권력을 가진 자가 미신에 빠질 때, 그 파장은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 이는 단순한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무지의 제도화이자, 통치 행위의 도구로서 미신이 악용되는 구조를 드러낸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종교와 정치가 결탁할 때 미신이 어떻게 공포와 통제를 통해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지를 적나라하게 분석한다. ‘신의 뜻’을 빙자한 폭력, ‘징벌’이라는 이름의 탄압, ‘구원’을 위한 희생 강요—이 모든 것이 인간의 자기 이해 부족과 권력자의 욕망이 결탁한 산물이다. 이 점에서 영화 ⟪신명⟫은 단지 한 무속 공동체의 내면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사회 구조 전체가 인간의 불안을 먹이 삼는 체계로 움직일 때, 미신은 거대한 정치적 수단으로 변모한다.
영화 속에서 윤지희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주술과 미신을 이용한다. 그녀는 신의 뜻을 빙자하여 사람들을 조종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다. 이는 스피노자가 지적한 미신의 정치적 악용과 일치한다. 권력자는 미신을 이용하여 대중을 통제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그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미신을 극복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개인의 이성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성적 구조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4. 영화 ⟪신명⟫: 신이라는 허구에 삶을 위탁한 자들
영화 ⟪신명⟫은 한국 전통의 샤머니즘, 현대인의 욕망, 그리고 종교적 집착이 뒤섞이는 세계를 통해, 인간이 신이라는 이름 아래 어떻게 자기 삶의 주체성을 포기하는지를 보여준다. 극 중 인물들은 각자 ‘신의 뜻’이라고 믿는 어떤 목적에 매달린다. 병든 가족을 살리기 위해, 미래를 점치기 위해, 혹은 죄의 대가를 회피하기 위해… 그러나 영화가 드러내는 것은, 이 모든 신념의 바닥에 불안, 죄책감, 욕망, 그리고 무지가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샤먼이 받는 신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해석된 주관이다. 그리고 그 해석의 기준은 바로 개인의 욕망이다. 신은 결국 인간이 만든 얼굴을 쓰고 인간을 지배한다. 이 지점에서 스피노자의 핵심 통찰이 영화의 서사에 겹쳐진다.
“인간은 신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신 속에 투사하고 있다.”
⟪신명⟫은 이러한 자기 투사의 폭력성과 그로 인한 사회적 파국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윤지희는 신을 조종한다고 믿지만, 실상은 신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불안, 권력욕, 열등감을 합리화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의 삶은 점점 왜곡되고, 결국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는 악몽에 휘말린다. 그녀가 추종하는 신은 실체가 아니라 환상이며, 그 환상은 점점 그녀를 삼켜버린다. 그녀는 주체가 아니라 타자화된 신의 목소리를 내는 ‘매개’가 되고, 주술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영화는 또한 윤지희만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녀를 추종한 수많은 이들, 대선을 앞두고 무속과 결탁한 정치인, 그를 둘러싼 참모들, 심지어 시청률을 좇는 언론까지…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신’이라는 이름에 자기 책임을 위탁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불확실한 삶의 해석을 타자에게 넘김으로써, 사고하지 않고 믿는 안락함을 택했다. 이는 스피노자가 말한 “이성의 포기”이며, 결국 “자기 노예화”로 이어진다.
5. 예속에서 자유로: 스피노자의 정치적 계시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은 단순한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자유는 신의 은총이나 우연한 계시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 자신의 능력, 곧 이성의 힘에 의해 실현된다.
그에 따르면 자유란 “자기 본성의 필연을 인식하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이성은 우리를 감정과 미신의 혼란으로부터 이끌어내며, 사물의 본성을 이해함으로써 감정을 정리하고 의지를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든다. 즉, 자유란 억제나 부정이 아니라 자기 능력의 명확한 인식과 실현이다.
영화 속 정현수 PD는 바로 이 자유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그는 초자연적 현상과 가짜 뉴스, 조직화된 종교 권력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대신 그는 맹목적 믿음보다 질문을, 복종보다 탐사를 택한다. 이는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강조한 철학적 자세—즉 “사랑이 아닌 두려움에 의한 복종은 진정한 덕이 아니다”—를 영화적 인물로 형상화한 것이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신앙의 진정한 역할은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선을 위한 협력과 평화를 가능케 하는 이성적 윤리라고 주장했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 정현수가 진실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은 단순한 취재의 장면이 아니다. 그것은 “신이라는 이름의 예속을 끊고, 인간 자신의 이성을 회복하는 선언”이다.
나가며: 신을 버리면 인간은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하는가?
영화 ⟪신명⟫은 한 여성의 몰락과 한 기자의 저항을 통해, 우리 사회가 여전히 ‘신’이라는 환영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고발한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철학은 우리에게 묻는다.
“신을 버리면 인간은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하는가?”
스피노자의 대답은 분명하다. 신은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이며, 인간 내부의 이성적 능력으로부터 발견되는 필연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의 뜻을 묻기보다는, 자기 본성의 인식과 실현을 통해 ‘자연 속에서의 인간’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는 예속적 인간의 상태를 이렇게 설명한다.
‘예속적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그저 운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거나, 자신보다 강한 능력을 지닌 개체에 압도되어 그저 수동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속적이 될수록 무엇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인지를 판단할 능력을 잃으며, 이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그저 맹목적인 채로 남아 있고, 자신의 능력이나 활동을 확대시키지 못한 채로 무수한 단절과 실패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에티카 4부 정리 증명)’
진정한 자유는 외적 명령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욕망의 본성과 그 근거를 명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 능력으로 통제할 수 있을 때 성립한다. 즉, 자유란 자율이며, 자율은 이성의 훈련을 통한 자기 통치다. 영화 속에서 윤지희는 그 자율을 외면하고 타자의 권위에 자신을 위탁했다. 반면 정현수는 진실을 추구하며 자기 인식의 길을 선택했다. 이 두 인물의 대비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말하는 예속과 자유의 분기점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신을 진정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신을 경외하지 않게 된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신은 자연의 무한한 질서와 필연성일 뿐, 인간처럼 벌하고 상주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명⟫이 드러내는 비극은, 우리가 그 ‘벌하고 상주는 신’을 믿고 싶어 하는 본능에서 비롯된다. 불확실한 삶에서 방향을 찾기 어렵기에 우리는 ‘신명’이라는 소리를 들으려 한다. 그러나 진정한 신명(神命)이란 타자의 말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목소리여야 한다.
우리가 신을 버릴 때, 혹은 신을 다시 정의할 때—우리는 삶의 모든 책임을 타자에게서 회수해야 한다. 그것은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다운 행위이기도 하다. 삶은 스스로 선택한 길 위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신이라는 이름 아래 살아가는 것보다, 스스로의 이성과 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더 어렵고, 더 아름답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던 신은 타자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었던 무지와 감정의 얼굴이었다는 것을.
참고문헌
1. 스피노자, 『에티카』, 박종현 역, 서광사, 1994.
2.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임희근 역, 아카넷, 2013.
3. ⟪신명⟫, 감독 이해준, 2024.
4. Gilles Deleuze,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City Lights Publishers,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