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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미로, 인식의 비극

『올드보이』와 『오이디푸스 왕』 비교

by 아레테 클래식


“누구냐, 넌?” — 오대수


이 대사는 단순한 정체성의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절규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지금 알고 있는 세계는 무엇이며, 그 세계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왔는가?” — 이 질문은 고대 그리스의 테바이 왕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정체와 과거의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던졌던 물음과 맞닿아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2003)는 소포클레스의 고전 『오이디푸스 왕』을 현대적 방식으로 변주하며, 인간 존재의 비극성과 인식의 고통, 그리고 자유의지와 운명의 교차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두 작품은 각각 고대와 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인간이 진실을 인식하는 순간, 그 인식이 곧 파멸로 이어진다’는 구조는 동일하다. 이는 인간의 본성과 윤리에 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을 우리 앞에 던진다.


1. 감금과 출생: 정체성의 최초 조건


『오이디푸스 왕』은 주인공의 출생부터 저주받은 운명의 길을 따라간다.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는 아들을 낳으면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아기를 버린다. 그러나 아이는 살아남아 다른 왕국에서 자라며, 자신의 출생을 모른 채 결국 친부를 살해하고 친모와 결혼한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이유도 모른 채 납치되어 15년 동안 감금된다. 그 안에서 그는 출생이 아니라 ‘말’로 인해 형벌을 받는다. 그가 고등학교 시절, 이우진과 그의 누이 사이의 관계에 대해 떠벌린 헛소문은 단순한 말이 아닌, 하나의 세계를 무너뜨린 ‘죄’가 된다.


“사람은 왜 죄를 짓는 줄 알아? 심심해서.” — 오대수


이 대사는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영화가 전개되면서 점차 무겁게 되돌아온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지에서 죄를 짓는다. 말 한마디가 인생을, 더 나아가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말은 더 이상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윤리적 선택이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철학을 시네마틱하게 구현한 것이다.


2. 퍼즐과 미로: 인식의 여정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테바이를 괴롭히는 역병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탐문을 시작한다. 그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불러 진실을 묻지만, 진실을 부정한다. 이 부정은 그의 자아를 보호하는 무의식의 방어기제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당사자임을 알게 된다.


오대수도 이우진이 설계한 퍼즐을 풀듯 하나하나 실마리를 따라간다. 그는 “왜 나를 가뒀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왜 나를 풀어줬는가?”, “왜 하필 이 여자인가?”로 이어지는 점진적 인식을 거친다. 그가 사랑하게 된 미도는 다름 아닌 그의 딸이다. 이 진실은 영화 내내 은밀하게 조작된 미장센과 상징 속에 숨겨져 있다.


“즐거웠어, 오대수. 너랑 난 신이 있는지 실험해봤잖아.” — 이우진


이 대사는 철학적 충격파를 던진다. 이우진은 자기복수를 하나의 ‘신적 실험’으로 정당화한다. 그는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신(부동의 원인)처럼 모든 사건의 원인으로 군림한다. 오대수는 이 퍼즐을 푸는 과정에서 점점 자유를 상실한다. 인식을 통해 자유를 얻으리라 믿었으나, 진실은 오히려 운명의 굴레를 더욱 조여온다.


3. 진실의 발견과 자아의 붕괴


『오이디푸스 왕』에서 진실이 밝혀지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른다. 그는 “빛이여, 이제 너를 보지 않으리”라고 외치며, 자신이 보고 있던 세계가 모두 허상이었음을 인식한다. 이는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자기 인식의 마지막 결과이자 철학적 응시이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진실을 안 순간, 말문을 잃는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은 혀를 자르는 것이다.


“나는 이제 당신의 개야. 멍멍! 멍멍! 그러니까 말하지 마. 제발 말하지 마.”


그는 짐승이 되기를 택한다. 이 장면은 고전 비극에서도 보기 힘든 강렬한 윤리적 자기 부정이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자존보다, 딸의 정신을 지키기 위한 보호자의 위치를 택한다. 여기엔 아도르노가 말한 ‘부정변증법’의 윤리적 전회가 있다. 자기를 긍정하는 대신, 스스로를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타인을 위한 윤리를 실현하려 한다.


그런데 이 장면이 더욱 처절한 것은, 오대수의 선택이 자유로운 동시에 무의미하다는 점이다. 그는 혀를 잘랐지만, 기억은 남고, 사랑은 여전히 그의 것이며, 죄는 지워지지 않는다. 이 역설은 사르트르의 실존적 자율성과 도스토옙스키적 죄의식이 충돌하는 자리에서 생겨난다.


4. 언어의 죄와 침묵의 윤리


『올드보이』는 언어의 영화다. 모든 죄는 말에서 시작된다. 말은 존재를 규정하고, 관계를 파괴하며, 진실을 드러낸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의 무게를 강조한다. 특히 이우진이 말하는 순간순간이 신의 음성처럼 들릴 정도다.


“말이라는 게 말이야, 씨발… 말이 씨가 된다는 말, 몰라?”


이우진의 복수는 단순한 감정이 아닌, 말의 윤리에 대한 실험이다. 이는 테이레시아스가 오이디푸스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장면과 평행한다.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의 말을 거부하지만, 결국 그 말이 진실로 드러나며 자아를 붕괴시킨다. 『올드보이』의 언어 역시 파괴적 계시의 기능을 수행한다.


“너는 아직도 상자 안에 있어.” — 이우진


이 대사는 관객에게 던지는 메타적 메시지이기도 하다. 오대수의 감금은 끝났지만, 그는 여전히 ‘말의 감옥’에 갇혀 있다. 인간은 자유로운 것 같지만, 우리가 믿는 진실, 기억, 말은 사실 타인이 준 코드일 수 있다. 이는 포스트모던 인식론의 핵심 질문이기도 하다.


5. 선택과 속죄: 진실 이후의 윤리


『오이디푸스 왕』에서 주인공은 유배를 자처한다. 그는 스스로 도시를 떠남으로써 테바이의 질서를 회복하려 한다.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최면술사를 찾아가 자신의 기억을 지워달라고 요청한다. 그가 택한 것은 유배가 아닌 망각이다.


“이제 괜찮은 걸까, 나?”

— 오대수 (최면 후)


미도는 오대수를 껴안는다. 그의 얼굴엔 미소와 눈물이 동시에 있다. 관객은 묻는다. 그는 이제 죄에서 벗어났는가?, 망각은 속죄가 될 수 있는가?


이 장면은 고대 비극이 감당하지 못한 질문을 던진다. 『오이디푸스 왕』의 세계에서는 신과 공동체가 윤리를 심판했지만, 『올드보이』에서는 오직 개인의 고통만이 남는다. 그에게는 신도, 절대적 규범도 없기에, 속죄는 고통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이는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절망, 니체의 도덕 너머의 인간상, 그리고 현대인의 무신론적 속죄를 연상케 한다.



나가며: 고대 비극에서 현대 스릴러까지, 인간은 진실을 감당할 수 있는가?


『오이디푸스 왕』과 『올드보이』는 각기 다른 시대의 산물이지만,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통한다. 두 작품은 모두 인식의 여정을 통해 주인공이 자신과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과정을 그린다. 그러나 진실은 해방이 아니라 형벌이며, 자아의 파괴를 동반한다. 이것이 비극의 본질이다.


“너와 난 신이 있는지 실험해봤다.”

— 이우진


이 대사는 이 시대의 신 없음의 윤리를 집약한다. 고대 비극의 신탁과 달리, 현대 비극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신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무서운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진실을 감당할 수 있는가?”

“우리는 죄를 잊는 것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가?”

“우리는 누구이며, 누구였는가?”


『올드보이』는 이 질문들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오대수의 절규와 침묵, 혀 없는 얼굴과 미소 짓는 눈물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비극은, 결국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감당해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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