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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도덕으로 보는 기생충

“지하로 내려갈수록, 의식은 더 날카로워진다.”

by 아레테 클래식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계급의 서사다. 지하에 사는 기택 가족과 언덕 위 고급 주택에 사는 박 사장의 가족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기를 사는 존재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생충이 진정으로 놀라운 이유는 단순한 계급 구도를 넘어, 존재론적 주종 관계의 전복을 탐구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등장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 직접 맞닿아 있다.


1. 주인과 노예: 인정을 위한 투쟁


헤겔에 따르면 인간의 자의식은 타자의 인정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그러나 이 인정은 처음에는 투쟁을 수반한다. 두 자의식은 서로를 지배하려 하며, 결국 한 쪽은 ‘주인(주체)’이 되고 다른 한 쪽은 ‘노예(객체)’가 된다. 하지만 이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인은 노동하지 않기에 대상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잃어버리고, 노예는 오히려 노동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며 스스로를 의식하게 된다. 노예는 외적 억압 속에서도 자기 인식을 획득하는 ‘내면의 승리자’다.


기택 가족은 표면적으로는 ‘노예’다. 그들은 박 사장 가족의 집에서 일하고, 이들의 삶을 모방하고, 심지어 냄새조차 따라 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의 교활함과 창의성은 바로 그 종속적 지위 안에서 자라난다. 아들은 미대생을 흉내 내고, 아버지는 운전기사가 되며, 어머니는 가정부로, 딸은 미술치료사로 위장한다. 이 모든 변신은 그들을 더 깊은 종속으로 이끌면서도, 동시에 시스템을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2. 노예도덕의 변증법


니체는 노예도덕을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헤겔에게 노예는 단지 굴복하는 존재가 아니다. 노예는 노동을 통해 세계를 가공하고, 두려움과 억압을 통해 내면화된 의식을 얻는다. 영화 속 기택의 가족은, 특히 기정과 기우는 이 ‘변증법적 노예’다. 이들은 지하실을 벗어나기 위해 박 가를 철저히 흉내 내고, 끝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까지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들이 단지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은 이 노예의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얼마나 억압받는지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지하실의 또 다른 ‘노예’, 전 가정부의 남편은 말 그대로 집의 하부 구조에 숨겨져 살아간다. 그는 박 사장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충성을 맹세하며, 심지어 집의 전등을 ‘주인을 위한 경례’로 켠다. 그는 인정투쟁에서 패배한 자의 궁극적 말로다. 이로써 영화는 단지 주종 관계의 전도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과 노예가 함께 매몰된 구조적 비극을 말한다.


3. 의식의 해방은 가능한가?


헤겔에 따르면 노예는 결국 세계와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자기를 인식하며 해방의 가능성을 얻는다. 그러나 기생충은 이 변증법의 완결을 미루거나, 심지어 부정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우는 언덕 위 집을 사서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그 장면은 현실이 아닌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해방은 꿈으로만 존재하며, 노예의 자의식은 구조적 장벽을 넘지 못한다.


결국 영화는 이렇게 질문한다:


노예는 언제까지 노예인가? 그가 주인의 자리를 꿈꾸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노예일 수 있는가? 혹은, 주인의 자리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를 상상할 수 있는가?


기생충은 헤겔적 의미의 노예가 ‘자기 인식’을 통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이상을 끝끝내 성취하지 못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바로 그 좌절을 통해, 우리는 헤겔이 말한 “부정의 부정을 통한 진보”가 단지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가장 날카로운 진실임을 알게 된다. 현실을 직시하고도 무너지지 않는 눈—기택 가족이 끝내 얻지 못한 그 눈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의 시작일 것이다.


4. 니체와의 교차점: 노예도덕은 왜 승리하는가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도덕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강자에 의해 창출된 주인도덕이고, 다른 하나는 약자—즉 종속된 자들에 의해 발명된 노예도덕이다. 주인도덕은 힘과 생명력, 창조성을 중심으로 “좋음”을 정의한다. 반면 노예도덕은 억압당한 자들이 자기 약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성한 “복수의 도덕”이다. 그것은 강자를 악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온순함과 겸손함을 미덕이라 주장한다.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기생충 속 기택 가족은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다. 그들은 강자를 닮고 싶어 한다. 박 사장의 집에 스며들며, 그들의 언어와 삶의 양식을 흉내 낸다. 이것은 노예도덕의 자기 정당화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약함을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히 강자의 룰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교묘하게 기회를 노린다. 니체적 의미에서 볼 때, 이들은 ‘노예도덕’의 전형이라기보다는 ‘주인도덕’을 내면화한 하층민이다.


그러나 영화가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노예도 ‘주인처럼’ 되려고 할 때조차, 구조는 그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불가능성은 니체가 말한 ‘반동의 윤리’—즉 강자를 기준 삼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만 자신을 규정하는 윤리와 닮아 있다. 기우의 마지막 환상, 즉 “돈을 벌어 지하실의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계획은 니체가 비판한 허위의식의 결정체다. 그것은 현재를 긍정하지 못한 채, 언젠가 도래할 허구의 ‘구원’을 기다리는 피안적 도덕과 다를 바 없다.


니체라면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왜 너는 박 사장의 집을 사려 하는가? 왜 그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는가?”


5. 헤겔과 니체: 서로 다른 희망


헤겔은 억압받는 자 안에 변증법적 의식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노동과 공포, 그리고 인내를 통해 노예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니체는 이러한 내면의 승화 자체를 의심한다. 그에 따르면 노예는 결코 주인이 될 수 없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않는 한 진정한 해방은 없다. 니체는 ‘강자의 윤리’를 부활시킬 새로운 인간, 위버멘쉬(초인)를 기다린다.


기생충은 이 두 철학자의 입장을 동시에 반영하고, 동시에 전복한다. 헤겔이 말한 자기의식의 각성과 니체가 경계한 허위 도덕의 덫은 영화 속에서 공존한다. 기우는 변증법적 자각에 도달하지만, 그 자각은 현실에서는 허무로 귀결된다. 결국 영화는 말한다:


“이 세계에서 해방은 철학이 말하듯 주어지지 않는다. 해방은 꿈일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꿈조차 꾸지 못하는 삶보다, 기우의 환상은 더 깊은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진정한 해방은 그 꿈조차 거부할 수 있을 때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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