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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율과 침묵 사이의 자유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본 체제, 악, 그리고 교육의 윤리

by 아레테 클래식


자유를 가르칠 수 있는가?


자유는 과연 배울 수 있는 것일까? 혹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일까? 피터 위어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청춘의 자유, 시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묵직한 물음이 잠복해 있다. 왜 어떤 자유는 끝내 좌절되는가? 그리고 그 좌절은 누구의 책임인가?


“Carpe diem. Seize the day, boys. Make your lives extraordinary.”

까르페 디엠. 오늘을 붙잡아라, 얘들아. 너희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라.


이 영화의 상징이 된 이 문장은 단순한 열정의 외침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사유하고 실천할 수 있느냐는, 존재의 윤리적 질문이다. 이 글은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푸코의 ‘규율 권력’을 통해, 죽은 시인의 사회를 단순한 성장 영화가 아닌 정치철학적 텍스트로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1. 악은 괴물의 얼굴로 오지 않는다


닐의 아버지는 폭군이 아니다. 그는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널 위해서”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그 말은 닐의 욕망이 아니라 아버지 자신의 좌표를 강요하는 것이다.


“You’re going to Harvard and you’re going to be a doctor.”

넌 하버드에 갈 거고, 의사가 될 거다.


이 문장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들에게 부과되는 체제의 명령이다. 그의 말에는 질문이 없다. 아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는다. 대신 정답만을 강요한다.


한나 아렌트는 말한다.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라 “사유하지 않는 관료”였다고. 닐의 아버지 역시 악의 의도를 가진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사유의 부재는 언제나 파괴로 이어진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확신이, 한 인간의 주체를 말살할 수 있다면, 그 확신은 사랑이 아니라 체제다.


웰튼 아카데미 역시 마찬가지다. 닐의 죽음 이후, 학교는 진실을 묻기보다 희생양을 찾는다. 그것은 개인의 존엄보다 체제의 안정을 우선하는 선택이다. 아렌트가 말한 ‘악의 구조’는 그렇게 반복된다.


2. 규율은 목소리를 지운다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권력이 어떻게 신체와 사고를 ‘조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설명한다. 학교는 그런 권력의 전형적인 공간이다. 웰튼 아카데미는 단지 교육기관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을 형틀에 맞춰 가공하는 체제의 기계다.


“We are food for worms, lads. Because, believe it or not, each and every one of us in this room is one day going to stop breathing, turn cold, and die.”

우리는 결국 벌레의 먹이다, 얘들아. 믿기 힘들겠지만, 이 방에 있는 모두가 언젠가는 숨을 멈추고, 차가워지고, 죽게 될 거야.


키팅은 이 말을 통해, 살아있는 동안 진짜 자신의 삶을 살라고 말한다. 그러나 웰튼은 ‘살아 있음’조차 규율의 대상이다. “전통, 명예, 규율, 탁월”이라는 학교의 모토는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행동과 사고를 통제하는 기준이 된다.


닐은 자살을 통해 체제에 반항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내면에 스며든 규율 — ‘나는 실패했다’는 자기비난 — 에 굴복했다. 푸코가 말한 권력은 외부의 억압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검열을 내면화한 주체를 만들어낸다. 닐은 그 규율의 ‘성공적인 결과’였다.



3. 자유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키팅은 단지 시를 읽게 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말하게 했다.


“No matter what anybody tells you, words and ideas can change the world.”

누가 뭐라고 하든, 말과 생각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키팅의 수업은 문학 수업이 아니라, 침묵의 구조를 흔드는 정치적 실천이다. 그는 푸코가 말한 권력의 방식에 정면으로 맞섰다. 아렌트는 인간이 ‘행동함’으로써 공적 세계에 출현한다고 했다. 키팅은 학생들에게 ‘행동’의 가능성을 가르친다. 그것이 말일 수도, 침묵을 깨는 몸짓일 수도 있다.


“Now we all have a great need for acceptance, but you must trust that your beliefs are unique, your own…”

우리는 모두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네 믿음이 독특하고 너만의 것임을 믿어야 해…


마지막 장면에서 토드는 마침내 책상 위로 올라선다. 그가 외치는 것은 단지 키팅에 대한 지지가 아니다. 그것은 침묵하던 자신이 세상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O Captain! My Captain!”

오 캡틴, 나의 캡틴!


이 외침은 위대한 연대의 상징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선언이다. 그는 더 이상 침묵 속에 숨은 학생이 아니라, 말하고, 책임지고, 드러나는 정치적 주체가 된다. 그것이 자유의 시작이다.



교육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죽은 시인의 사회는 우리에게 자유를 찬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가? 그 자유를 사유하고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녔는가?


“The powerful play goes on and you may contribute a verse. What will your verse be?”

삶이라는 거대한 연극은 계속된다. 당신은 그 대사에 어떤 구절을 보탤 것인가?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개인의 성장담이 아니다. 그것은 체제 안에서 인간이 침묵하게 되는 과정을 해부하며, 동시에 그 침묵을 깨우는 교육의 윤리를 묻는 영화다. 진정한 교육은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자기 목소리를 찾고 말하도록 돕는 일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곧 세계에 대한 개입이다. 자유는 단지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사유되고 훈련되어야 할 윤리적 실천이다. 그때 인간은, 단순히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가 된다. 삶이라는 연극에 어떤 대사와 구절을 보태는가는 결국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자에게 주어지는 ‘명예의 보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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