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래빗』과 아도르노가 말하는 철학의 시작점
영화 『조조 래빗』을 보고 나면 이상하게 가볍지 않다. 분명 웃긴 장면도 많고, 유쾌한 리듬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뻐근해진다. 그건 아마도 이 영화가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를 슬쩍 건드려 놓기 때문일 거다.
나치 독일, 전쟁, 세뇌, 유대인, 아이, 상상의 히틀러… 이 소재들을 다루면서도 영화는 한 편의 동화처럼 흘러간다. 그런데 이 동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 지금까지 네가 믿어온 게 진짜라고 확신해?”
“그 믿음 안에 누군가의 고통은 사라진 적 없어?”
이런 질문은 철학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질문을 아주 오래전부터 던져온 철학자가 있다. 바로 아도르노다.
1. 히틀러는 내 친구였다?
조조는 열 살짜리 소년이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 상상의 히틀러와 대화를 나눈다. 그 히틀러는 귀엽고 웃긴 말투로 조조를 다독여주고 응원까지 해준다. 아이 입장에서는 나치라는 이념이 무섭거나 잔인한 게 아니라, 오히려 친근하고 멋진 무엇이었다.
조조는 그냥 ‘따르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그 세계를 이미 ‘자기 자신’으로 삼고 있는 상태다.
아도르노는 이런 걸 **“거짓된 자기 동일성”**이라고 불렀다. 나는 독일인이니까, 히틀러를 좋아해야 하고, 유대인을 미워해야 한다는 그 믿음. 그건 ‘자유로운 판단’이 아니라 ‘주어진 이념과의 동일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체는 거짓이다.”
전체가 왜 거짓일까? 왜냐면, 전체는 항상 부분의 고통을 가리고,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 철학은 언제나 **“부정에서 시작”**된다. 의심하고, 멈칫하고, 다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한다.
2. 뿔 달린 유대인은 없었다
조조는 어느 날 집에서 몰래 숨어 있던 유대인 소녀, 엘사를 발견한다. 그 순간 그는 당황한다. 유대인은 괴물이어야 하는데, 눈앞에 있는 엘사는 그냥 사람이다. 숨 쉬고, 말하고, 상처도 있다.
“유대인은 어때?”라는 조조의 물음에 엘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너희처럼 숨 쉬고, 웃고, 울어.”
이 한 마디가 조조의 세계를 흔든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동일시할 수 없다. 그가 믿어온 세계가 눈앞의 타자 앞에서 금이 가기 시작한 거다.
아도르노에게 이건 중요한 전환점이다. 전체주의는 타자를 지운다. 타자라는 존재를 ‘이상한 것’ 혹은 ‘악한 것’으로 만들면서 자신의 세계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타자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세계는 균열된다.
그게 바로 철학의 시작이다.
불편함에서 철학은 시작된다.
3. 신발 한 켤레만이 말해주는 것
영화 중반, 조조는 길을 걷다가 교수형에 처해진 시체 하나를 본다. 화면은 그 사람의 신발을 비춘다. 조조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신발은 조조의 어머니, 로지의 것이다.
아무 말도 없다. 음악도, 설명도 없다. 그저 신발 한 켤레.
아도르노는 말한다.
“진짜 고통은 언어 바깥에 있다. 그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오히려 침묵이다.”
말하지 않는 예술, 설명하지 않는 장면, 그 침묵 속에서 관객은 그 고통의 무게를 감당하게 된다.
전체주의가 만든 죽음, 그 무의미하고 압도적인 폭력을, 우리는 그저 조용히 바라보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도르노가 말한 ‘예술의 윤리’다.
설명하지 말고, 느끼게 하라.
4. 히틀러에게 작별을 고한다
전쟁이 끝나고, 상상의 히틀러는 다시 조조 앞에 나타난다.
“이제 다시 유대인을 죽이러 가자!”라고 외친다.
하지만 이번엔 조조가 말한다.
“꺼져, 히틀러.”
그리고 히틀러를 발로 차버린다.
이건 상상 속 친구를 없앤 장면이 아니다.
이건 조조가 자기 안에 내면화했던 전체주의와 결별하는 장면이다.
아도르노는 철학이 정답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 대신 “계속해서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했다.
조조는 이제 전체에 예속된 존재가 아니다. 그는 타자와 연결된 존재, 인간으로서 사유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간다.
5. 춤추는 두 사람
영화의 마지막 장면.
전쟁이 끝났고, 엘사와 조조는 서로를 바라본다.
조조는 묻는다.
“이제 뭐 하지?”
엘사는 대답한다.
“춤출까?”
그들은 어색하게 몸을 흔든다. 폐허가 된 세상 속에서,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그들은 춤을 춘다.
아도르노는 말했다.
“예술은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희망이 필요하다는 걸 잊지 않게 할 뿐이다.”
조조와 엘사의 춤은 완성된 해답이 아니다.
그 춤은 말한다.
우린 아직 살아 있다.
우린 아직 사람이다.
다른 삶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철학은 멀리 있지 않다
『조조 래빗』은 아도르노의 철학을 아주 인간적인 방식으로, 한 소년의 성장기를 통해 보여준다.
이 영화는 말한다.
거짓된 전체를 믿는 대신,
한 사람의 얼굴을 보라고.
정답을 따르기 전에,
그 정답 아래 숨겨진 고통을 보라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직 춤출 수 있는 몸을 기억하라고.
철학은 멀리 있지 않다.
철학은 그저 이렇게 묻는 일이다.
“그게 정말 옳은 걸까?”
“그 말 아래서 누군가 울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물음을 멈추지 않는 것.
그 고개 돌리지 않는 것.
그리고 조조처럼, 때론 말하는 것.
“꺼져, 히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