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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봄, 부활을 소망하며

톨스토이 부활 서평

by 아레테 클래식

<출처: MSNBC>


부활, 톨스토이의 위대한 자전적 장편 소설

위대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그의 삶 중반기에 기독교 진리를 재발견하고 그 가치를 삶 속에서 실천하려 노력했었다. 그는 자신의 유산을 가지고 음주, 도박, 매춘에 탐닉하는 젊은 시절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안나 까레리나에 등장하는 레빈과도 같이 소작농들의 사회로 들어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고된 노동을 실천하면서 그들의 고된 삶을 이해하고 동화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자기반성은 자신의 작품 곳곳에 뭍어난다.


이번에 읽은 부활에서도 농촌의 빈곤한 현실 앞에 고뇌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그려진다.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나라님도 해결하기 힘들다는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소작농들이 직면한 빈곤한 현실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그는 글로 읽은 헨리 조지의 지대론을 역설하며 소작농들에게 자신의 토지를 공유하는 결단과 실천을 감행한다. 그는 토지를 저리에 빌려주면서도 소작농들에게 조금의 부담을 줘야 하는 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는 비참한 현실 근저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에 눈을 돌리게 된다. 우연히 배심원으로 참여하게 된 카츄사의 재판이 그 계기가 된다. 젊은 시절 그녀를 범한 후 책임지지 못해 그녀가 타락했다는 죄책감에 그녀의 구명을 시작하면서 그는 사회 구조의 악을 발견하게 된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 없이 타인을 도구로 대하는 법관, 간수, 성직자, 귀족, 상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좌절하지만, 한편 이를 개선하기 위해 자신의 온 삶을 기울여 노력하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다. 카츄사와의 결혼을 통해 속죄할 마음으로 시베리아까지 따라 가지만, 결국 결혼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의 헌신과 사랑에 감동해 카츄사는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부활은 천 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이다. 그리고 부활은 첫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 마지막 페이지가 궁금해 단숨에 읽어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찬탄한 구성과 위대한 사상을 담고 있으므로 관심 있으신 분들은 꼭 읽어 봤으면 좋겠다.


심오한 사상이 담긴, 그리고 긴 소설을 읽고 난 후 이 말이 꼭 하고 싶었다. 인간에게 있어 자유는 돈이나 명예 따위를 가지고 논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자유를 논할 수 있는 사람은 이웃의 고통을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우는 나날을 보냈던 사람이다. 그 자유는 적어도 자신의 평탄하고 안일한 삶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전전긍긍하며 그들을 삶의 실천으로 연민하고 사랑한 다음 내뱉을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톨스토이의 고백처럼, 이 시대에도 황제, 귀족, 법관, 상인, 소장처럼 권력과 부를 가졌으나 서로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잃은 인간을 보기란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우리의 리더가 최소한 스스로 죄 많은 인간임을 자각하고 '궁핍에 처한 인간은 자유를 알 수가 없지 않냐'라고 반문하는 인간이 아니길 바란다. 오히려 어느 누구도 사람을 처벌하거나 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항상 모든 사람을 몇 번이고 한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달은 양심 있는 인간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나 나는 오늘 산상수훈의 진리 앞에 평안하지도 자유 하지도 못한 채 분노할 수밖에 없음이 통탄할 따름이다.


우크라이나 봄, 부활을 소망하며

<사진출처: 연합뉴스>


러시아의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의 말처럼 푸틴은 경기 하강 문제로부터 러시아인들의 관심을 돌리고,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2022년 2월 24일 새벽 우크라이나 침공을 단행했다. 나는 모든 걸 떠나서 푸틴이 2000년 이후 다섯 번이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우려된다. 이는 20년이 넘는 집권 기간 동안 선거 조작, 언론탄압, 재야인사 구금 등 많은 문제가 있는 동시에 합법이라는 제도의 허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정치적 사건이다. 다수결의 원칙도 결국 민주주의의 형식일 뿐 전부일 수 없다.


우리는 나치즘이 독재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의민주주의라는 정상적인 제도를 통해 이루어진 사건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시 독일 국민 다수가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나치의 통치 권력을 인정했다는 것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국민에 대한 협박이나 폭거에 의한 정권 찬탈이 아닌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지지 속에 나치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했던 역사를 다시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가 대의 정치의 모순과 한계를 자각하지 않는다면, 대중 위에 강력하게 군림할 '히틀러'는 언제든 재등장할 것이다. 아렌트의 말처럼 '철저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내재한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


톨스토이는 당시의 지배 계층이 약자와 국민의 현실을 도외시하고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에 개탄했다. 그의 말처럼 서로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잃은 인간을 보기란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놀라운 것은 19세기의 러시아의 상황이 지금과 그리 달라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이 단행된 후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은 러시아 안보를 위한 조치라는 보도를 접했다. 그러나 침략 전쟁이 아니라 자국민의 보호를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것을 순진하게 믿을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전쟁에서 자신의 권력과 힘을 과시하려는 권력에의 욕구를 발견할 따름이다. 그리고 사건의 진실보다는 절차의 정당성만을 무심히 따지던 판사들, 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자신의 급여와 뒷돈에 관심이 많았던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 허약한 죄수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죽어가는 것에 눈도 꿈쩍하지 않고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칩 했던 호송군인들이 생각났다. 이들 모두는 흉악범이 아니라, 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공직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반성하거나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는 법을 잊은 자들이다. 아우슈비츠의 대량학살은 이념과 신앙이라는 합법의 미명 하에 저질러진 참상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절대적 통합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는 것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다행히 오늘 보도에서 러시아 내부에서 이번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가 확산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떤 명분에서든 이웃 나라를 공격하고 선량한 시민들을 학살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각해 침략 전쟁에 반대해 속이 뒤집혀 거리로 나왔다는 전쟁 반대자들의 인터뷰를 간과해서능 안된다. 잘못된 권력의 결정에 대해 일반 시민들이 엄연한 판단의 주체자이며, 이 역사를 책임질 주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부활의 첫 문단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아무리 돌을 깔아도

그 틈바구니로 아무리 뽑아버려도

석탄이나, 석유로 아무리 그을려도

또 아무리 나무를 자르고

짐승과 새들을 모조리 쫓아버려도

봄은 정령 봄이었다. "

<톨스토이 '부활' 첫 문단에서>


톨스토이는 부활을 봄의 심상으로 그려냈다. 봄이 시작되는 지금 세계는 전염병과 전운으로 우울하기만 하다. 하지만 시대를 초월해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어려운 시기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서로의 삶을 통해 서로를 들여다보고 연민하고 긍휼한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 인류의 큰 불행 앞에 우리는 작은 희망의 씨앗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이 세계의 온갖 추악함을 상기해보고, 이와 같은 계율로 양육된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보는 일을 각자 시작해야 한다. 그동안 누군가가 아무리 돌을 깔고, 전쟁의 포화 속에 우리를 그을리고,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삶에 터전에 모조리 쫓아버리더라도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다. 네흘류도프가 기나긴 괴로움과 고통 끝에 갑자기 평안과 자유를 찾아낸 것과도 같이.

그리고 나는 미국이나 서방 국가들의 무력이나 경제 제재를 통해서가 아니라, 깨어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선량한 시민들과 범지구적 연대로 이 전쟁이 조기에 그리고 완전히 종결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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