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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Jan 24. 2024

풀무불에 달궈진 인생

작지만 위대한 학교 거창고등학교

작지만 큰 학교: 풀무불에 달궈진 인생


풀무원의 의미는?


풀무질 있잖아요. 쇠 달구는 풀무질. 그거 하자는 뜻이었어요. 내가 부천에서 청년들을 모아 농사짓기 시작한 곳이 미군 비행장 부근이었어요. 미 군목들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 '하우스보이(미군부대에서 잡일 하던 전쟁고아)들을 보낼 테니 농사도 가르치고 교육도 시키겠느냐'라고 했어요. 내가 '보내라'고 했지. 그 사람들 모아 일을 시작했어요. 일이 사람을 만드는 풀무질이지요. 쇳덩이가 풀무질로 쓸모가 되듯이. 그래서 이름이 풀무원이에요.<고 원경선 이사장>


큰농부 원경선의 발자취

<고 원경선 이사장>


 원경선(1914~2013)은 식품 제조 및 유통 기업으로 알려진 '풀무원'의 창업주이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사일과 집안일을 도우며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가 빚을 남긴 채 돌아가시자 누에를 치며 빚을 갚고 농부가 되었다.


농사일을 열심히 하며 땅도 사고 집도 샀지만 군청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난 뒤 서울로 상경해 여러 가지 일을 하다 결혼을 하고 중국으로 가 인쇄소를 차렸다. 해방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건설 회사에 다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을 계기로 다시 농부가 되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갈 곳 없는 사람들을 모아 풀무원이라는 농장을 설립하고 함께 농사를 짓고 먹고살았다. 풀무원 농장은 그의 시후에도 그 유지를 받들어 함께 먹고사는 생명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우연히 유기농에 대한 책을 읽고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해 3년 만에 성공하게 된다. 그는 누구보다 땅을 소중히 여기고 생명 존중과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 건강한 먹거리를 꿈꾸었던 이 시대의 큰 농부였다.


청년 기업가의 꿈


일제강점기에 그는 성공한 청년 농장주였다. 일제의 압제가 노골화되자 그는 중국으로 옮겨갔고  베이징에서 인쇄소를 운영하기고 했다. 해방 후에는 토목건축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불혹이 넘어 그는 새로운 삶을 택했다. 1955년 경기도 부천의 황무지 1만 평에서 새 꿈을 담은 풀무원을 지었다. 풀무원은 협동농장 체제로 운영되었는다. 초기에는 구성원의 절반이 고아와 떠돌이, 부랑자들이었다. 원경선 원장은 오전에는 성경과 교양 교육을 하고, 오후에는 영농기술이나 양계법을 가르쳤다. 슬하의 7남매도 차별 없이 풀무원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활했다. 풀무원 구성원들과 한방에서 자고 한솥밥을 먹게 했으며, 농사일과 허드렛일도 똑같이 시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55년 농촌공동체로 시작한 '풀무원'은 1976년 국내 최초의 유기농 운동체인 '정농회' 설립으로 이어진다. 바른 유기농 먹거리를 표방한 풀무원의 설립자이지만 군사정권 시절 창업주의 자리에서 물러난 나셨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정권의 불의한 요청에 대쪽 같이 반대하셨고 그와 관련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셨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그는 사람을 바로 세우기 위해 경남 거창고등학교 이사장(1960)을 맡았다. 지난 세월 그는 거창고의 영적 정신적 지주가 되어 학생들에게 훌륭한 삶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는 또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국내 최초의 국제구호활동단체인 '기아대책 한국지부'를 창설하셨다. 1992년에는 78살의 나이에도 브라질 리우환경회의 글로벌포럼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뒤, 환경단체인 '환경정의시민연대'를 발족한다. 학창 시절 우리는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매년 '코 뭍은 작은 돈'을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돕는 일에 보태기도 했었다. 우리보다 춥고 배고픈 자들에게 눈길 주는 일을 멈추지 말라는 가르침은 내게 지금도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 17>


학창 시절 꽃피는 봄이 오면 거창고는 3일 동안 신앙집회를 연다. 오전에는 전교생을 상대로 주제 설교를 하고 오후에는 3학년 만을 대상으로 원 이사장이 직접 로마서를 강해해 주시는 시간이 있었다. 입시 준비에 여념이 없는 3학년이지만, 매년 로마서 강해는 양보 없이 진행되었다.!


그의 깊이 있는 성경 강해는 평생 '이웃 사랑, 생명 사랑'을 삶으로 실천해 오신 그의 삶과 겹쳐져 큰 울림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의 생전 설교가 문서나 육성으로 남아 있지 않다. 나는 그 일이 너무 오래되어서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씀을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인지적 기억이 아닌 감정적 기억으로 말이다. 나 말고 원 이사장의 로마서 강해를 기억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 바로 현 거창고 전성은 이사장이다. 그의 증언을 살펴보도록 하자.


<거창고 전성은 이사장, 출처: 오마이 뉴스>

"거창에 와서 계속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저자 각주, 그는 거창고 8회 졸업생이다.), 3학년 때 원경선 이사장님(풀무원 창립자)이 오셔서 사흘간 로마서 강의를 해주셨어. 원경선 이사장님이 창립하신 풀무원은 단순한 농장이 아니고, 옛날 나(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 소록도 경주, 거창 공동묘지 옆에 있었는데, 당시 남쪽에만 있는 병으로 불렸어. 그 동네에서 부모는 나환자인데 자녀는 나환자가 아닌 경우 그런 아이들이 갈 곳이 없는 거야. 고아원에서도 안 받아줬어. 그런 아이들을 모아서 같이 농사를 짓는 곳이 풀무원이었던 거야.

그분이 4번에 걸쳐서 로마서 강의를 해주시는데, 그때 기억이 나는 게 눈이 오는 날인데, 전교생 200명 정도가 의자를 가져와서 옛날 의료 선교사가 사용하던 창고에 모여서 사흘간 강의를 진행했어. 그때 이사장님 강의를 듣고 문득 의대 말고 농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농대에 가서 농민들을 잘살게 도와주는 공부를 해서 다시 거창에 돌아와 농사를 잘 짓는 방법을 교육하는, 농사를 짓는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지. 그 당시 (농촌은) 참 가난했거든, 그때 가난했던 걸 지금도 상상하기 힘들어. 우리 죽전동네가 또 가난한 동네였는데, 여름이 되면 아이들이 밑에는 옷을 안 입고 윗옷만 하나 걸치고 있는 거야.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 입혔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아마 빨랫거리를 줄이려고 그랬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해. 아무튼 그때 이사장님의 로마서 강의를 듣고 농대에 가기로 결심했지.

강의 중에 이사장님께서 큰 강물 그림을 그려주셨어.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이 중간에 강물을 만나. 그때 예수님이 강물에 들어가더니, 3일 뒤에 다시 반대편 물가로 나오시는 그림이야. 그때 제자들이 ‘죽어도 사는구나, 죽어도 죽는 게 아니구나’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거지. 십자가 죽음을 그렇게 설명한 거지. 로마서 4~6장 설명을 그렇게 해주셨어. 4장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게 신앙이라는 거야. 그 강의를 듣고 의대가 아니라 농대를 가야겠다, 농민들을 도와줄 수 있는 공부를 해서 돌아와 선생을 하며 농촌 발전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서울대학교 입학 요강을 찾아보니까 농업경제과가 있더라고. 나는 이름만 보고 이거다! 확신했고, 내가 생각하는 분야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지. 그렇게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농대를 가서 공부하고 돌아온다고 하니까 그렇게 좋아하시더라고. 좋아하시던 기억이 나."<Humans of Geochang High School>


필자가 3학년 때 기독학생회 저녁 예배 대표기도 전 로마서 5장의 일부분을 낭독하며 기도한 적이 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6~8>


 기도를 듣고 당시 샛별중학교 교장이었던 전성은 이사장은  화답처럼 해주셨던 말씀이 기억난다. 우리 중에 로마서의 핵심 복음을 설명하는 구절을 알고 기도 중에 낭독재학생이 있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하셨다. 이어서 복음에 대해 말쓴 하신 복음에 대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로마서의 믿음은 종교적 신념이나, 심리적 확신, 이데올로기 등과 다르다. 믿음은 십자가를 따르는 삶 즉,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웃을 나아가 원수를 위해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는 삶을 결단하는 것,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이다."<거창고 전성은 이사장>


 이 설교는 전성은 거창고 이사장의 설교에 대한 나의 희미한 기억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 이사장인 전성은 선생의 설교이지만, 원경선 전 이사장의 강해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하므로 원경선 이사장의 설교를 재인하는 단초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불경하게도 이 글은 필자의 부족한 기억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실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필자의 마음에 아로새겨진 그의 가르침을 복원하는데 매우 소중한 기억이므로 잃어버린 기억의 재연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생각해 보려 한다.


나의 로마서 이해


이제 나의 기독교 신앙관을 얘기해 보려 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생각이므로 나의 빈약한 성경지식과 몰이해로 인해 많은 오류가 있다면 어떤 지적이라도 달게 받겠다. 그러나 그 지적은 오롯이 나의 것이지 내 스승님들이 나를 잘못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두고 싶다.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피켓을 들고 크게 소리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아마도 신약 성경의 로마서를 바탕으로 확립된 '이신칭의'의 교리를 요약한 말일 것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26>


고교시절 내가 배운 믿음은 종교적 신념, 심리적 확신,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구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기만 한다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종교적 신념, 심리적 확신,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것과 저것의 차이는 내게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만났던 요단강 사이만큼 큰 간격으로 다가온다(사실 요단강은 그리 큰 강이 아니지만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이생과 천국(하나님의 나라)을 가로지른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이렇게 표현해 봤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31>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구약의 율법과의 관계를 기술한다. 그리고 그는 '율법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은 파기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은 어떤 지위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약속의 의미가 있다. 법은 의무와 당위의 형태를 갖고 있지만, 그 법의 정신은 선한 주인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실천적 의지를 수반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애굽에서의 법을 완전히 대체하는 독립선언서와도 같은 것과 같은 이치다. 즉, 자유와 신뢰의 상징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통치 안에서의 자유를 얻었지만, 광야를 걷고, 전쟁을 불사해야 해야 했다. 또 처자식을 살려야 할 긴박한 운명 앞에 놓인다. 구약의 인간들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과 기아 앞에 그들은 신을 원망했을 것이고, 치열한 생존 경쟁을 치러야 했다. 그들은 곧 하나님을 원망했다.


나는 십자가 상에서의 예수의 부르짖음이 이런 문제의식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고난 앞에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려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부르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역사상  동일한 좌절을 경험했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을 알고 있다.


내가 어려서부터 읽고 공부한 복음서를 관통하는 예수 구원의 사역은 단 한 번의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의 십자가는 광야에서 들렸던 놋뱀 사건을 연상하게 하는 사건이다. 장대에 달린 놋뱀은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보고, 그의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다짐과 실천을 촉구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어린양'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구원이 시작된다는 의미이지 구원의 완전한 종결로 볼 수는 없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려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당연히 그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의 삶을 따라 살겠다는 실천을 수반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나는 천국이 인간의 모든 고뇌와 고통이 사라진 상태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수한 고통과 괴로움을 과감히 이겨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천국이 있다면 천국에 걸맞은 의식과 실천방식을 가진 천국시민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구약성서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권능을 신뢰한 이스라엘 백성의 자발적인 순종으로 이어진다. 즉,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Hessed)는 마트 매대에 올려 놓은 값싼 행사 상품일 수 없다.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백성들이, 이제는 그 받은 은혜를 깨닫는다. 그리고 그 은혜를 깨달은 인간들이 서로서로 은혜 베풀기에 참여하는 공동체가 바로 구약성경의 이상향이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이 이루는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그 순례의 여정을 불평하고 나아가 신과의 계약을 파기한 불의했던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역시 우리의 실천적 결단을 촉구한다. 나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개신교의 '이신칭의'교리가 표면적으로 큰 논리적 비약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교리가 마치 믿는 것과 행동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으로 오해하게 된 이유를 고대 그리스 철학의 영향에서 찾고 싶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가 영원히 선할 수 없다는 '플라톤의 이원론적 이데아론'을 지칭하는 것이다. 생각과 행동은 칼로 무 자르듯 구분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내가 진심으로 신앙하고, 신뢰하는 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증의 정신분열'이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삶은 거창하고 추상적인 개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순도 100% 영적인 상태나, 심리적 확신 안에 갇혀서는 안 된다. 믿음은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창에 찔려 피를 흘리는 지난한 삶의 실천 속에 오고야 말 하나님 나라의 약속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율법이 폐기된 것은 새로운 언약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지, 율법의 정신 자체가 무력화되었기 때문임이 아니다.


신약은 구약의 전통 위에서 또다시 하나님 나라를  변주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또 다른 언약이 아니라, 신약시대를 살아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언약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과 신약은 하나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 혹은 하나님의 은혜의 수혜라는 공통의 주제를 밝히 드러내 보이는 진리의 말씀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진정한 죄는 눈에 보이는 범죄보다 더 복잡하다. 진짜 죄는 내면에 감추어진 악마적 본성임을 은폐한 채 천국의 이상을 설파하며 맹신하는 곳에서 독버섯처럼 자란다. <나의 아저씨의 죽음, 아레테 클래식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는다 것으로, 이생에서 내가 저지를 모든 죄가 탕감된다는 것은 과도한 신앙의 비약이다. 우리 삶에서 지옥의 이상을 제거하고, 천국의 이상만 설파하는 것이야말로 거짓말로 우리를 기만하는 사이비적 유혹이다. 그것이야 말로, 천국과 현생을, 선과 악을 교묘히 구분하여 이생을 포기해 버린 종교 이원주의자들의 교묘한 책략이며 나는 단호히 이런 입장에 반대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내가 과거에 정리해 놓은 니체의 <우상의 황혼>에서 이렇게 정리한 적이 있다.


니체는 이전의 많은 현자들이 그러했듯 소크라테스도 삶은 무가치 할 뿐만 아니라 회의와 우울이 가득하다는 것 그리고 그의 삶은 병들어 있었다고 지적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플라톤적 이원론은 현생의 삶을 부정하고, 내세의 완전함을 추구하는 철학이다. 니체는 그들이 현실의 삶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할뿐더러 삶의 가치를 평가 절하했다고 비판한다. 무엇보다 소크라테스가 주장한 새로운 도덕주의는 마치 그를 의사나 구원자처럼 보이게 했지만, 사실은 그는 병자였고, 죽음을 통해 자신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던 데카당스(염세주의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니체의 지적이다. <니체 우상의 황혼 강독, 아레테 클래식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라는 말이 정말 어떤 신앙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이것이야말로 현생의 삶을 부정하고 내세의 완전함을 추구하는 염세주의적 철학의 징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삶을 평가절하하는 이원론적 기독교 사상이 2천 년 기독교사를 얼마나 병들게 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현대 교회를 관통하는 진짜 문제는 '예수천당, 불신지옥' 아니라 그 악마적인 본성을 은폐하거나 외면하고 값없이 구원받은 척하는 위선과 근거 없는 선민의식이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들을 듣고 전통적인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듣는다면 즉시 반대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 없다. 불경스럽게도 나는 오랜동안 기독교인이 아니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심지어 나는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무덤에서 꽃처럼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시대에도 무수한 사람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종교적 구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끔찍한 고통의 차원에서, 나는 그들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40년 전 영도의 어느 신학교 운동장에서 폭풍우 속에 임하신 나의 하나님과 고교시절 지리산 뱀사골에서 '내가 누구를 보낼꼬'라시며 강권하시던 그분의 말씀과 그날 봤던 밤하늘의 총총하던 별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믿음 없이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던 시절, 에티오피아의 어느 정글 속에서 만났던 보석 같은 아이들의 셀 수 없었던 눈길 속에 임하신 그분의 눈동자를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그 시절 나를 찾아오신 그분의 시선은 오늘날 나를 향하고 있다. 나는 그의 눈동자를 통해 '부모 없는 고아처럼 굶주리고, 슬픈 아이들이 빈 들에 버려져 있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우리가 함께 꿈꾸었던 아름다운 작은 나눔들이 그들의 허기를 채우고, 그들의 빈 마음을 채워줄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다시 사심의 의미'를 기억할 것이다.


나의 어리석고 불충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스승 원경선과 전성은이 평생의 사랑의 실천으로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마태복음의 진리를 다시 한번 상기하며,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4~28)


빈들에 마른 풀도 돌보시는 하나님

버려진 고아들의 허기를 채우시고
때마다 만나와 메추라기 보내주소서.

오늘날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십자가의 길을 걷는
남은 의인들의 고통과 신원에
응답하여 주소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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