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위대한 학교 거창고등학교
뱀사골의 밤하늘의 반짝이던 별빛들
: 작지만 위대한 학교 거창고등학교
1. 봄소풍 가는 날
이번 글은 1996년 어느 봄의 이야기다. 6월이 되면 거창고는 봄소풍을 간다. 말은 봄소풍이지만 1박 2일 캠핑에 가깝다. 거창은 관내에 덕유산이 위치하고 있다. 지리산도 차량으로 1시간 이내에 접근 가능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가진 도시라 할 수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초여름이 되면 학생들은 자율적으로 3-5명 정도의 조를 이뤄 대자연 속에 1박 2일 야영을 하며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봄소풍을 가기 전날 학교는 매우 분주한 느낌이었다. 삼삼오오 장기자랑을 준비하고. 캠핑 장비를 정비하고, 각자 식사와 마실 것들을 쇼핑한다. 그야말로 축제가 따로 없었다. 평소에 큰 마음먹어도 가기 힘든 큰 산들(지리산, 덕유산 등)의 산행 길은 너무 낭만적이고 설레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거창고 교정>
학교 오전에 학교 운동장에 집결하여 버스를 타고 목적지로 이동했다. 학생자치회가 중심이 된 별도의 선발대는 캠핑 장비를 트럭에 나눠 싣고 숙영지로 출발했다. 목적지로 이동하는 1시간 남짓한 시간에도 끼 있는 친구들은 남다른 노래와 춤사위로 봄소풍의 흥을 돗꾼다. 당시 수줍었던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저 녀석들은 평고에 자신의 끼를 어떻게 참고 살았을까?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교생은 주차장에 도착했다. 학생들의 인솔교사의 가이드에 따라 줄줄이 산행을 시작한다. 당시 600여 명이었던 전교생이 참여하는 산행은 2~3시간 정도의 짧은 코스였다. 너무 긴 경로는 대규모 이동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 같다. 비교적 여유로운 산행길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음미할 충분한 기회를 제공한다.
청소년 시기는 스스럼없이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 자체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교사들은 제자들을 규칙 속에서 강제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좋은 기준을 선택해서 자신의 고유한 길을 찾아갈 수 있게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거창고의 봄소풍은 자율성이라는 큰 틀 안에서 저마다의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중요한 교육의 장이었다.우리는 저마다의 목적을 지니고 세상에 왔다. 오늘 밤 많은 학생들은 지리산 뱀사골의 신령한 기운을 느끼며 자신의 온 존재를 고민하며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를 숙고하게 될 것이다.
2. 천상의 음식과 제의들
<좌: 뱀사골, 우: 그 시절 친구들>
아침 7시에 시작한 오전 일정은 11시 숙영지 도착으로 마무리되었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각자 준비해 온 텐트를 설치한다. 1학년들 중 대부분은 이런 캠핑을 처음 경험한다. 학생들이 숙영지를 정리하고, 배수로를 파고, 텐트를 펼치고, 살대를 엮고, 튼튼하게 팩을 박고, 플라이를 설치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1시간 정도 지났을까 화창한 봄날이지만 학생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진짜 문제는 여학생들이다. 경험도, 힘도 부족한 여학생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자신의 텐트 치기가 완성된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의 히어로를 자처한다.
이제 해는 중천에 떠서 밥 먹을 시간이 되었음을 알린다. 뭐니 뭐니 해도 봄소풍의 백미는 캠핑음식을 해 먹는 일이다. 곧 텐트를 치고 점심을 준비하며 분주해지지만 점심식사를 준비하는 손길은 왠지 불안하다. 학생들은 팀별로 각자 역할을 나눠 쌀을 씻고, 김치찌개를 끓이고, 야채를 씻어온다. 요리를 해 본 적이 없는 학생들에게 밥을 하고 국을 끓이는 일은 만만치 않다. 문득 엄마의 손길이 그리워진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삼시 세끼를 해결해야 한다. 내가 아니면 나와 함께 우리 식구들(팀원)은 배를 곯아야 한다.어쩌면 오늘은 엄마의 따뜻한 밥이 더 그리운 날일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쌀이 설익었다. 뱀사골의 높은 해발고도를 고려하지 않은 탓이다. 산악캠핑에서 밥을 할 때는 높아진 고도를 고려해 냄비 뚜껑 위에 돌을 올려놓거나, 밀폐가 되는 솥을 사용해 압력을 높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위 삼층밥(아래는 타고, 중간은 익고, 위쪽은 설익는)은 먹을 것을 각오해야 했다. 찌게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각종 야채와 된장을 넣어 그럴듯한 모양새를 내긴 했지만 첫술을 뜨자마자 얼굴이 찌푸려진다. 간 조절에 실패해 소금소태를 씹어먹는 듯한 기분이다. 밥과 찌개는 실패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최후의 보루 삼겹살이 남았다. 삼겹살 요리는 실패하기 매우 어려운 품목이다. 설익히거나 태우지 않는 이상 맛있고 근사한 정찬을 즐길 수 있다. 뱀사골은 이제 600여 명의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고기 굽는 연기로 자욱해진다. 마치 대지의 신 데미테르에게 고기와 포도주를 바쳤다던 고대 그리스인이라도 된 것처럼 향기로운 짐승의 향기는 대지를 뒤덮는다. 자신의 딸 페르세포네를 잃어 슬픈 여신은 , 오늘만큼은 자신의 분노를 거두고 인간의 축제를 기뻐 받아주지 않았을까?
학창 시절의 여행은 학생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극대화시킨다. 질풍노도의 시기의 몇몇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감시를 피해 어른들만 마실 수 있는 금단의 음료를 탐닉했다. 텐트를 치는 동안 경험 많은 선배들은 텐트와 먼 거리에 있는 곳에 땅을 파고 낙엽으로 철저히 위장했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학생들보다 몇 수 위다. 한두 번 오는 봄소풍이 아니다. 학생주임 선생님과 몇몇 젊은 남자 선생님들은 군대의 전비태세 검열관이라도 된 듯 텐트 주변을 샅샅이 뒤져 술들을 찾아낸다. 그러나 아무리 경험 많은 교사라 하더라도 개성 강한 모든 학생들의 탈선을 막을 수는 없다. 구세대의 금기를 넘어서고 싶은 신세대의 열망은 언제나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은밀한 밤이 오면 소중한 음료를 지킨 몇몇 아이들은 억압된 욕망을 위로할 신의 음료를 맛보게 될 것이다. 쓰지만 달달하고 맵싸하면서 황홀한 이 음료를 맛본 인간은 금단을 넘어 짜릿한 진정한 자유의 맛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3. 대자연의 위대함을 배우다
저녁에 있을 장기자랑을 빼면 대부분이 자유시간이다. 학생들은 뱀사골의 계곡과 숲에서 휴식을 취하고, 산책도 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진정한 소풍을 만끽한다. 물론 끼 부릴 준비가 된 아이들은 장기자랑 준비에 여념이 없다.
나는 이 오후 시간에 웅장하고 깊은 산속에서 이루말할 수 없는 경외감에 사로잡혔다. 태고에 존재했을 것 같은 원시림의 향연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에메랄드 빛 계곡, 꽃과 나무와 각종 생명들을 보며 이 자연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작고 초라한 존재인지를 사유했다. 근대 철학의 큰 줄기를 바꿨다고 평가받는 임마뉴엘 칸트는 자신의 저서 <실천이성비판>에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의 마음을 더욱 새롭고 더욱 커다란 놀라움과 경외감으로 충만시켜 주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내 머리 위의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이 그것이다.
<실천이성비판, 임마뉴엘 칸트>
이 글은 내가 학부 때 뇌과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던 신경심리학 과목의 교재 서문의 내용과 흡사했다. 나는 마흔이 넘어서야 칸트의 저작을 읽었다. 처음 이 문장을 접했을 때 나를 마법처럼 매료시킨 문장의 원 저자가 심리학 교수가 아닌 철학자 칸트였다는 사실을 알고 큰 배신감을 느꼈다. 그것도 잠시 금사빠인 나는 칸트의 세계관과 인간관에 또다시 깊이 빠져들었다. 위 글의 내용은 인간과 세계 사이에 있는 엄청난 거리와 그로 인해 어떤 대상이 무한히 확장되는 현상에 대한 경이로움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나의 밖에 존재하는 별은 아스라이 닳을 수 없는 초월적 존재였다. 그렇지만 나는 별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나와 대상에 대한 생각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지구와 행성의 무한한 운동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인식은 무한한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나는 한 알의 모래알 같은 존재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나는 소멸해 버릴 것 같은 두렵고 떨리는 경외감에 휩싸였다.
반대로 내 마음속에 있는 어떤 감정은 나의 존재를 무한히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우주와 닮았다. 아직도 완전히 개척되지 못한 인간 심연을 세계를 탐구하다 보면 나는 세계와 타자와 분리된 몰아의 경지를 경험한다. 나의 인격 속에, 그 인격의 지층들이 만들어내는 세계 속에는 분명히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 그것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합목적성을 가졌을 것 같은 특별한 존재를 느꼈던 것 같다.
4.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
저녁이 되면 전교생이 야영지의 중앙으로 모여 행사를 준비한다. 행사 전에 보통 교장 선생님의 훈화의 시간이 있었지만 올해는 특별한 분이 학교를 방문했다. 거창고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미국의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벤더월프라는 교수님이 방문하신 것이다. 교수님의 설교를 영어 선생님이 통역하는 방식으로 훈화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당시 벤더월프 교수님의 설교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해보고자 한다.
"노스웨스턴 대학을 대표하여 거창고등학교 학생 여러분에게 인사를 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저는 거창고등학교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올바른 교육을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뿐만 아니라 우리 학교의 다른 많은 분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두 학교가 진지한 관계로 발전되기를 원합니다. 도재원 선생님과 전성은 선생님(샛별중학교 교장)이 우리 학교를 방문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나 역시 이 학교를 방문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오늘 저녁 나는 이사야 6장 1-8절 사이의 내용을 가지고 잠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볼까 합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독특한 경험을 합니다. 오늘 나와 여러분이 이 아름답고 경이로운 자연 속에서 경험하는 것도 그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연 속에서는 성전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를 가깝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사야가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여호와, 그의 영광이온 땅에 가득하시다' 하고 말하자 성전의 문설주가 흔들리고 안개와 같은 연기가 자욱하였다고 했습니다. 오늘 저녁, 우리가 첫 번째로 받아들여야 할 교훈은 하나님의 존재를 온몸으로 느끼고 그 존재를 굳게 믿는 일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교훈은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자신 속에 있는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죄가 가득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사회가 타락하는 것에 대해 사회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불평을 하는데 이 사회의 문제는 우리들 자신의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바로 여러분 개개인이 사회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습니다.
세 번째 교훈은 바깥세상의 필요에 의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거듭나고 깨어나서 올바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충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자연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무언가 필요가 있어서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름에 저를 보내주십시오 하고 응답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노스웨스턴 신학교에서 외국 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에게서 미래의 희망을 보곤 합니다. 오늘 여러분을 만나서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시리라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축복하셔서 귀하게 써 주시길 원하는 나의 기도를 끊이지 않겠습니다. 아멘."
<울타리 없는 학교 거창고등학교 이야기, 배평모, 한걸음>
나는 그날 밤 지리산 뱀사골을 흔들어 깨우던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전인적 존재로서 나에 대하여 또 신에 대하여 깊은 숙고의 시간을 보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수없이 되뇌었다. 물론 어떤 대답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나는 그날 밤 계곡을 전율하게 하는 신의 기운 앞에 두려웠었다. 그날 밤 억수 같이 비가 왔었다. 새벽에 일어나 배수로를 팠지만 여기저기 새로 생긴 계곡 탓에 무너지거나 심지어 떠내려간 텐트들이 많았다. 다행히 큰 사고는 없었다. 대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작고 벌레같이 하찮은 존재인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교훈석: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
그날 아침 안개가 자욱했던 뱀사골은 더욱 거룩해 보였다. 그 지리산에서 느낀 자연에 대한 경외감은 어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거창고의 교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나는 이 문구의 의미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공부라는 것 자체가 내가 아는 것이 미천하고 한없이 부끄러운 존재임을 고백하는 일이다. 그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아직 공부가 덜 된 사람이라 보아도 될 것이다. 나는 수 천 년 전 이사야가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온 땅에 충만한 어떤 기운 앞에 완전히 압도 당했다. 나는 그날 아침 채플 시간에 울며 기도했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 주십시오.'
최근에 원경선 이사장님의 생애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거창고를 통해 알게 된 우찌무라 간조, 김교신, 함석헌, 류영모, 원경선, 장기려 등이 모두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배운 로마서가 우찌무라 간조로 시작해, 함석헌의 씨알 사상으로 또 원경선의 생명존중사상으로 이어진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이 중 장기려와 원경선은 거창고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들은 정말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최근 존경하는 은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내가 최근에 썼던 김밥할머니, 도스토옙스키, 원경선 이사장님 등의 여러 글들을 보내드리기도 했다. 선생님께서 반가워하시며 내게 책 2권을 보내주셨다. 그 보내주신 책 중에 내가 군대 가기 전에 잠깐 기숙사 부사감을 할 때 쓰셨던 귀한 책의 내용 일부를 소개할까 한다.
녹슬고 불순물이 덕지덕지 붙었고, 또 물러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쇠 덩어리를 대장간에서는 불에 녹여 불순물을 떼어내고 쓸모 있는 쇠 성분을 만들고, 그것을 수 차례 달고 식히고 단단하게 두들겨서 강하고 날이 선 연장을 만든다.
거창고등학교 생활관은 이 세파에 녹슬어 불순물이 덕지덕지 붙고 물러서 연약한 사람을 자율적 생활을 통하여 잘못된 가치관과 이 세파에 병든 허위의식들을 떼어내고, 약해 빠져서 제구실도 하나 못하고 힘이 없는 인간을 바른 생각과 의식을 가진 사람, 강해지고 당당하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 거짓되지 않고 진실된 사람, 내적 힘을 길러 세상과 이웃에 봉사하는 사람 즉 참된 인격의 힘을 지닌 사람을 길러내는 인간 대장간이다.
<생활로 사람됨의 힘을 기른다, 거창고등학교 편, 한걸음>
나는 아직도 신앙도 없이 정처 없는 탕자 같은 삶을 살고 있다. 한없이 부끄럽지만 훌륭한 스승님들을 둔 덕분에 그나마 이만큼 사람 구실하며 살 수 있었다. 세파에 녹슬어 아무짝에도 쓸 수 없었을 나를, 사람 만들어 주신 스승님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스승님은 자신의 책에서 우리가 육신을 신에게 반납해야 할 때, 내 삶 중에 쓸만해서 물에 가라앉을 무게가 되는 알맹이는 오직 사랑뿐이라 하셨다. 우리는 잠시 지구로 소풍 나왔을 뿐이고 우리를 보내신 존재가 있다면, 사랑이라는 보물을 찾으러 보내셨을 것이라고.
'다른 일에는 다 실패하더라도
'참된 사랑'을 찾는 일에는
실패하면 안 된다'는 말씀에 나는 또 침잠한다.
소유니, 존재니하는 하는 말들이 얼마나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잡담들인지. 이 새벽 저기 저 죽전만당에서 울리는 여명의 종소리에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