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다카시마 카에몬
김훈의 역사 소설 '칼의 노래'는 읽다가 멈춘 채, 다시 이어서 읽지 못했다.
인격이 유린되고 죄없이 처참하게 도륙되는 조선백성들의 삶을 읽자니 먹먹했고
무능하고 간사한 조선 국왕(선조)의 행태에 열불이 나서, 책장을 계속 넘기기가 힘들었다.
김훈의 22년 신작 역사소설 '하얼빈'은 그에 비하면 쉽게 끝까지 읽혔다.
청년 안중근과 한국 초대 총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하얼빈으로의 마지막 여정과
심리를 담담하게 다루고 있다.
그의 전작 '칼의 노래'에 비하면 감정선을 자극하거나 지나치게 잔혹한 묘사들도 없다.
책 후반부 다음 대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구리하라 형무소장이 사형집행을 선언하고 나서 안중근에게 말했다.
- 할 말이 더 있는가?
안중근이 대답했다.
- 없다. 다만 동양 평화 만세를 세 번 부르게 해 다오.
죽음을 몇 초 앞둔 청년 안중근이 하고 싶었던 말, "동양 평화"가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던 진짜 이유이자 신념이었으리라.
청년 안중근은 한국인들에게는 의사(義士)로 불리고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일본인들에게는 흉한(凶漢)이자 테러리스트로 격하된다.
한국 초대 총감이었고, 일본 내각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자 위대한 정치가로 일본인들에게 추앙받고 있다. 일본 국익을 위해서 한국을 침탈했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청일전쟁을 벌였고 승리했다. 하지만 대다수 한국인들에게는 조선침탈의 상징이자 원흉이다.
그런 그가 대외적으로 내세운 것도 "동양 평화"였다.
일본의 실업가이자 易聖(역성)이라 불리는 다카시마 카에몬(高島嘉右衛門)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가기 전, 그로부터 주역점을 부탁받았다. 그가 얻은 점괘가 重山 艮(중산 간)卦였다.
주역 64괘 중 52번째 괘인 艮괘는 멈춤(止)이라는 의미다.
삶의 멈춤이라는 의미로 해석한 다카시마 카에몬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하얼빈에 가지 말라고 했다.
훗날 호사가들은 점괘인 重山艮괘가 안중근(重根)의 이름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되고 나서, 다카시마 카에몬은 이토가 하얼빈으로 가지 못하도록 만류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면서 점치는 것을 중단했다고 한다.
주역점의 대가, 다카시마 카에몬은 점괘 해석대로 이토에게 하얼빈에 가지 말라고 했다.
일본제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이토는 (만류가 있었으나) 하얼빈으로 갔다.
山처럼 굳은 신념을 가진 청년 안중근은 (자신의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며) 조선독립과 평화를 말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갔다.
세 사람 모두 자신의 믿음대로 말하고 행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