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한 자루를 붙잡고 칼날을 들이댄다. 검은 페인트에 싸여 있던 연필이 하얀 몸통을 드러낸다. 그 깝질을 도려내니 검은 연필심이 돌출한다. 빙글 한 바퀴를 돌며 그 심을 다듬는다. 종이 면을 사각거리며
글자가 새겨지는 감촉이 좋다. 요즘 같은 때 샤프를 사용하면 간편할 텐 데, 그래도 나무 연필이 손가락 사이에 붙잡히는 게 좋다.
누구였을까?
기억도 가물가물한 초등학교 시절, 나는 옆 친구의 새 연필을 슬쩍하고 말았다. 일을 저지르고 나서 그 사태를 어떻게 감당할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친구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혐의가 가지만 겨우 짝이라도
곁에 있음을 고려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후로 그는 며칠씩 제 자리를 비웠다. 주인 없는 의자가 공허한 시간을 며칠 보낸 후, 담임 선생님은 그의 소식을 전했다. 그 친구는 끝내 병마와 싸워 이기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게는, 그가 죽었다는 충격보다는, 이제 그의 연필을 훔쳤다는 의심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안도가 더 컸다
어쨌거나, 그는 무슨 병으로 저리도 일찍 딴 세상 사람이 된 것일까?
막상 그리 되니 그의 연필이 껄끄로워졌다.
"괜찮아. 짝이 된 기념으로 네게 준 거야."
마음속에서는 이렇게 죄를 지워주고 있었지만, 그 연필은 더 이상 아무렇지 않게 책상에 올릴 게 아니게 되었다.
집에서 처리하고 말면 될 일을 기어코 드러내지 못하고 학교로 가져왔다.
"미안하다. 네 것 되돌려 줄게."
빈 책상 선반에 그의 연필을 몰래 돌려놓았다. 청소 당번이 일부러 그 주변을 둘러보지 않는 한, 주인 없는 연필은 내내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혹은 누군가
발견했다 하더라도, 죽은 친구의 것이라 꺼림칙해 그냥 놓아둘 것이다. 그 후 그 연필이 그대로 있었는지, 아니면 사라졌는지는 기억에 없다.
연필을 깎고, 그것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려보는 건 누구에게나 있는 버릇이다. 하지만 그 친구는 그런 일상을 제대로 겪어 보지도 못하고 일찍 세상을 저버렸다.
그런 오래된 기억의 파편이 여기 연필 끝에 묻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