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
'우편, 게시글, ~뒤의, 기둥, 직책' 따위의 뜻을 갖고 있다. 이중 일반적 쓰임새가 예전엔 '우편', 요즘은 '게시글'이다.
여기서, 'post' 자체는 단단히 고정된 것의 이미지를 갖지는 않는다. 이것이 'signpost'처럼 '기둥'에 이르면, 간접적 견고함의 인상을 줄 수는 있다. '~뒤의' 의미는 'post season'에서와 같다. 역할을 맡은 자리로는 'teaching post'처럼 활용된다. 그처럼 'post'는 홀로도 뜻을 갖지만, 다른 것과 합쳐져 성격을 달리한다.
사후에 의미를 갱신하고, 어떤 자리를 할당하는 것처럼 말이다.
'post'는 그처럼 하늘거리는 종잇장에 질서를 부여하는, 기둥 위의 튼튼한 집도 된다.
길을 지나는 데, 어느 집에 'POST', '우체통'이 보인다. 오랜 세월을 암시하듯, 칠이 벗겨진 낡은 함이다. 그 속에는 각종 우편물이 고개를 떨구고 있다. 관심을 받지 못한 듯, 바람에 흔들리거나 햇빛에 바랜 채로 말이다.
우편함에는 혹, 뜻밖의 안부 편지가 있을까?
가슴이 쿵쾅거리며, 밤새 써 내려간 연애편지도 있을까?
아니면 해외로 떠나, 홀로 남은 엽서가 뒹굴고 있을까?
벽면이든, 기둥 위 우편함이든, 시대는 그 견고함을 털어 버렸다. 수많은 사연과 설렘 대신, 깃털같이 가벼운 인쇄물이 자리를 다투고 있는 것이다. 혹은 망할 과태료 고지서, 연체금 독촉장 같은 꼴 보기 싫은 종이 조각만 어지럽다.
예전에도 post는 이런 인쇄물로 숨 막혔을까?
'POST'는 'post'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그 둘은 다르다. 그런데 둘은 다시금 같아진다. '~뒤로'가 이번에는 달갑잖게 post 되고 말았다.
대문자 POST는, 그 위엄을 잃고 소문자 post가 된 것이다. 세상을 받들던 굳건한 다리는 야위어졌다. 다행이랄까,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던 사연도 동시에 가벼워졌다. 이제 post는 단단하지 않다. 무르며 가냘프다.
그렇게 가볍고 야들해진 post는, 세상 어디라도 팔을 뻗친다. 시공을 넘어 자취도 남길 수 있다. 이제 'POST'라는 내용의 무게는, post의 외적 부피로 대체된다. 필요하면 무한한 복제, 한껏 겉껍질을 부풀린 포장으로 말이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 그런데 이미 굳은 손은 필기구를 잡지 못한다. 대신에 자판기 위로 손가락이 기억을 두드린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아니다. "그간 연락도 못 드려 죄송합니다."로 시작할까?
말을 건넨 지 오랜지라, 처음 인사말조차 서투르다. '톡톡' 뒤로 지우기 기능만 반복한다. 멀어진 시간만큼 글자는 계속 후퇴한다. 여러 글을 편집하거나,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고 싶은 심정이다.
연필 끝이 종이에 상해를 입히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글쓰기가 어렵다. '쓰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작업'이다. 도구를 빌린 이 작업은, 그렇게도 마무리된다. '편지 한 장 '쓰는' 일은 한나절 걸린다. 컴퓨터는 뜨거운 호흡으로 치열한 '작업'에 가담했다. 하지만 메일 창을 여는 수신인에겐 설렘이 없다. 아니, 그보다 낮은 온기도 없다. 작업 도구는 그리도 열기를 내뱉었는 데 말이다.
책상 한 모퉁이에는 오랫동안 밀쳐 둔 post-it이 보인다. 무언가의 'it'을 머릿속에 'post'하는 도구이다. 줄을 그어도, 한 귀퉁이에 메모를 남겨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이 실패로 얻은 발명품은 한 뼘 기억을, 추억을 새기는 자리이다. 물리적 접착력은 약해도, 마음의 흔적은 오래 붙들어 둔다.
싫었던 과목, 자신을 괴롭히던 삶의 넋두리...
post-it은 붙였다 떼어내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가슴 뭉클한 위로이다.
"우리 딸 오늘도 파이팅!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책을 펼치는 순간, 엄마의 사랑도 펼쳐진다.
떨어지는 건 금방이어도, 그 쪽지는 평생의 추억이 된다. 어떤 접착력도 넘어서는, 마음의 POST인 것이다.
세월이 흘러 그 POST는 post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부드러움을 품은 'post-it' 이다.
'~뒤의'라는 갱신을 품은 POST.
대문자 POST는 그렇게 되돌아온다.
'투다닥...'
메일 창을 열고 글을 쓴다. 아니, '새긴다'. 좀 더 신중을 기하려면 메모장에 썼다가 복사해서 붙이면 된다. 다수에게 보내는 의례적인 글이라면 집단 발송 기능도 좋다.
그런데 누구도 자세히 읽는 사람이 없다.
동일한 내용이지만, 수신인들은 또한 무엇이 새겨진 지 모르는 것도 똑같다.
그렇게 수백 명에 보내는 수고는 이만 끝!
전자 우편은 더 이상 '우편'이 아니라, 일종의 '게시물'이 된 것일까?
나만 읽는 글이, 혼자만 보는 글도 아니다.
post가 '우편', '게시글'과 의미를 함께 하는 것이 새삼스럽지 않다.
POST는 그 자체로 '견고하지는 않지만, 시대에 물살에 짓물러졌다. 마음을 전하던 글은 이제 '메시지'로 된 지도 제법 됐다.
"중간고사 수행평가 과제 다음 주 월요일까지 제출"
"귀하의 이름으로 카드가 발급되었습니다. 본인이 신청하지 않은 경우는 콜센터...."
좋은 일이든 그 반대이든, 메시지는 차갑게 post 한다. 따뜻한 낭만이 배달되던 우편함은, 어느새 읽지 않거나 읽어서는 안 되는 메시지로 가득하다. 눈물이 우편을 적시지만, 낭만 대신 배신과 분노가 흘리는 눈물이다.
하지만 '우편, POST'가 '게시글, post'로 바뀌어도, 존재간 소통은 고정된다.
우리가 몰랐던 것은 도구 변화보다는, 소통이 부재한 것이다. 장치는 끝도 없이 늘어나도, 소통은 되려 줄어든다. 그것은 소통량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담긴 질적 소통을 일컫는 것이다.
한 때 영어 소통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던 사람은 어떻게 했는가?
지나는 현지인에게 일부러라도 길을 물었다. 디지털 시대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 길 안내 맵을 이용 하면 그만인 것이다. 도구에 post 하고 도구 메시지를 수신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소통이다. 그렇더라도 소통은 본질을 잃지 않는다. 서로가 온기를 나누는 것, POST로 돌아가는 길이 험난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