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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인-노현수

by justit


도망가자 도망가자~~'
현실에서 달아나면 꿈꾸던 이상향이 펼쳐질까?
소망하던 일상이 마침내 마법처럼 나타날까?
30년도 더 된 과거, 우리는 어느 직종 할 것 없이 100:1이 넘는 평균 경쟁률을 뚫고 입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취업하기는 몹시 힘든 일이었지만, 내가 그 관문을 통과할 즈음이 그래도 조금은 형편이 나은 시기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경쟁률은 그만큼
높았다. 지금이야 세월이 바뀌어 꿈의 직장이라 불리는 공기업이지만, 그때 당시는 괜히 힘들게 지원하는(?) 분야였다. 일반 사기업 채용처럼 추천이나 서류전형이 아니라 이래저래 때를 놓친 지원자들이
수많은 과목을 치르는 경쟁시험 형식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든 어쨌든, 겉으로는 힘들게 입사한 그곳이 도무지 마음에 와닿지를 않았다. 경직된 기업문화에, 하는 일은 전혀 어떤 보람도 안겨 주질 못했더랬다. 그것이 비단 공기업만의 성격이 아님은 잘 알고 있으며 직장인에게는 누구나 불만이었겠지만, 암튼 그랬다.
"이놈의 직장! 때려치워야 하는 데..."
"내가 먼저 걷어 친다!"
걸핏하면 입사 동기를 만나 서로가 이런 넋두리로 조직생활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기를 몇 개월, 어느 날 그로부터 잠깐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내려받고 우리는 벤치에 앉았다.
그날도 조직생활에 대한 푸념이 춤을 추겠지 싶었다.
"나 회사 관두려고."
"응, 정말?"
동기는 마침내 퇴사를 결심했다. 그러면서 나이 30이 넘어 이제야 하고 싶은 미술 공부를 위해 미대 입시를 새로 준비할 것이란 것이다. 그 친구가 무척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했다. 모든 불안과 거친 현실을 감안하고도 그는 제 길이라 여겨지는 것을 찾아 떠났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화가가 되었으면 혹 인터넷에 검색될 수도 있으려나 싶어 찾아봤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이름 있는 화가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그가 꿈꾸던 삶을 살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나는 결국 그리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나도 그 당시 내가 하고 싶던 것을 위해 다른 길을 택했다면 이제야 나를 찾았다고 그것에 만족하면서 살게 되었을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선택에 후회는 덜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나도 뒤늦게 예전의 희망을 좇아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있지만, 쉽지는 않은 노릇이다.
오늘, 문득 흘러나오는 '도망가자~'하는 노래를 들으니 꽤나 오래된 일이 새삼스럽게 떠 올라 갑자기 그 시절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타인의 희망, 요구에 부응하려 하거나 거꾸로 그들을 이용하는 도구적 삶을 꾸리는 게 오히려 일상이다. 그래서 상식적인 것보다는 비상식적인 것이 되려 일상이 되고 만다. 만약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 것 같으면 이를 감추기 위해 안타깝게도 기억상실증에 걸리거나, 거짓의 재생산을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감추어야만 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허위와 진실이 뒤섞여 어떤 것이 진정인 지 구별도 못하게 된다.
이런 삶의 방식은 이제 단순히 차별받던 여성처럼 일부 계층, 소수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늘날은 역설적으로 다수가 그런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래서 오늘의 삶은 소위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도구적 이성이 압도하여 끊임없이 갈등이 재생산되는 비극 일색일지도 모른다. 지속적인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며, 그것에서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니 한병철의 '불안사회'에서 보는 것처럼, 오늘의 현대인에게는 불안과 우울이 만연해 있다.
이것이 정체성의 문제라면, 혹은 그것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두면, 실상 그것은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대리인'이라는 표현은 잃어버린 정체성, 타인의 삶 '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삶을 자신의 것처럼 사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는 좌표 없는 깊은 방황이 따르며 그것은 고통으로 이어진다. 암이라는에 상징적 극한에 이르는 지경으로 말이다.

타인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체를 회복하는 일은 사실 말이 쉬운 것이지 ' '나'라고 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관계로 맺어진 세계와 단절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체성, 본래적 삶이란 참으로 무엇일까?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현대인의 삶은, 살아가기보다는 어쩌면 '살아내기'가 더 적합한 말인지도 모른다. 사랑받는 자식, 자랑스러운 부모, 능력 있는 직장인, 친절한 이웃 등
그러다 보니 나 자신의 삶이 아니라 대리인으로서의 삶, 타인에 반영되는 삶을 살아가는 게 지극히 흔한 모습이다. 여기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정신적 갈등이 상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때마다 정체성, 주체라는 녀석이 꿈틀거린다.
"도대체 무얼, 누굴 위해 이러는 것인가?"
"나는 '나'라는 인생을 꾸리고 있는가?"
정말 모호하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퍼붓지만 여전히 돌아오는 건 결국 평범한 결론이다.
그저 주어진 데로 평범하게 사는 것!
어디 자기를 찾는다고 애쓰는 장면을 한 번 떠 올려보기로 하자. 그러면 역설적인 대답이 돌아온다. 예를 들어, 기억이 침몰해 그것을 되돌리려 하는 것이 자기 회복의 고투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망각하는 것이 자기 회복일지도 모른다. 남을 위해 애쓰는 대리인의 삶보다는, 모든 걸 잊고 자신만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는 정신적 측면이고, 육신적 문제에도 해당한다. 암 같은 난치병은 자신에게 극한의 고통과 공포를 초래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때 비로소 오롯이 자신에 몰입하는 계기가 되지 않는가!
물론 이는 비유적이며 그 같은 사태를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현대적 삶은 다양한 관계로 인해 요소요소에 갈등이 발생한다. 고대 원시인처럼 사냥감 확보, 습격으로부터의 방어 등 한정적 고뇌에 비해서는 훨씬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다채로운 갈등 속에서 많은 역할이 중첩되는 부조리 구조속에서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가증되며, 이로 인해 현대인의 신경증은 일반적 현상이다.
그만큼 주체적 삶을 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강한 자기 회복력이 작용한다. 자기 의지라는 게 무엇인 지 조차 의문이지만, 인간들은 그것이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방황하는 정체성을 종교, 철학적 거대 담론에서 찾을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상식이 통하는 세상 정도일 것이다. '덕봉의 신분차별 저항',
'죽음에 맞서는 중첩', '자신에 대한 불이익과 향후 겪을 고통을 감수하며 내부고발자가 됨으로써 타인의 도구로서 사는 삶을 거부하는 대리인'같은 곳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모든 실상은 타인의 삶, 타인의 인정이 아닌, 자기의 삶, 자기 인정으로 회복하는 일인 것이다.
그것은 비상식에 저항하는 삶임을 거듭 확인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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