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게 쉽지 않다.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직관적으로 워낙 당연한 일이 되다 보니, 별 의심을 갖지 않는다. 그럼에도 수월하게 세상사는 일이 없는지에 대해서는 솔깃하다. 그래서 어려운 일은 그것이 빚어진 순간에서야 그 존재를 인식한다. 말하자면, 어려운 삶은 종합명제처럼 아무 새로운 앎을 전달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 자신이 그리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나오는 자기 계발서 같은 책에서 이런 문구를 본 적이 있다. “행복을 늘리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줄여라.”
우리가 추구하는 바가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에 있다면, 행복을 양적으로 늘리기란 쉽지 않으니 그 반대로 고통을 줄이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뜻일 것이다. 나름 공감이 가는 바이다. 우리는 공리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다 보니, 계량화된 비교에 익숙하다. 거기에 인류는 진보한다는 낙관주의에 기대어 한걸음 뒤로 물러나거나 멈추는 행위를 곧 퇴보로 여긴다.
사회의 전반적 방향이 그러하니, 그 흐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참 씁쓸한 면도 있다. 지금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손에 쥐고 있는 모바일 기기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벽돌 같은 휴대폰이 신기했고,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가정용 전화기만으로도 세상은 잘 굴러갔다. 즉, 지금의 편의와 속도가 절대적 조건은 아니었다. 물론 생활의 질은 현재보다 떨어졌을 수 있다. 하지만 각종 피해에 노출되는 부정적인 면과 비교했을 때, 과연 지금의 편익이 그만큼의 값을 하고 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전기자동차만 봐도 그렇다. 매연도, 굉음도 없이 도로를 달리니 가히 ‘친환경적’이라 부를 만하다. 하지만 그 에너지의 근원은 여전히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고, 태양광이나 풍력조차 자연에 일정한 변형을 가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지금의 ‘친환경’이란 표현은 다소 눈가림에 가까울 수도 있다. 기술 발전이 곧 절대적 선이라는 믿음에 균열이 생기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발전의 또 다른 방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작정 앞만 바라보는 속도전이 아니라, 때로는 ‘멈춤’ 일 수도 있다. 물론 이 주장에 곧바로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모두가 동시에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미 충분한 것을 가지고 있기에 뒤로 물러설 수 있지만, 한 번도 그 수준에 도달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멈춤’은 실천 불가능한 사치에 가깝다.
결국 ‘멈춤’이란 선택은 보편적인 권리가 아니라 계층과 자원의 문제와 얽혀 있다. 발전의 속도를 늦추거나 멈추려면 일정 수준의 안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멈출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는 근본적인 간극이 존재하며, 이 간극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모순을 가장 선명히 드러낸다.
따라서 진정한 발전은 단순히 멈출 용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멈출 수 없는 현실 자체를 직시하는 시선이어야 한다. 그 점을 무시한 ‘멈춤’은 공허한 외침이 될 뿐이다.
욕망에 관한 논의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욕망이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흐르고 연결되는 성질을 지닌다 해도,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일 것이다. 그것이 내용 없고 무기력한 외침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한 걸음 멈출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지금의 속도전에 균열을 내는 가장 작은 시작일 것이다. 여전히 무력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