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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들의 이름

by justit

모서리에는 얼마 전 재포장한 바닥이 보인다. 그 부위는 잦은 통행으로 파손에 취약한 곳이다. 그런 수선 표면에 누군가 'SJ'라고 새긴 이름이 보인다. 덧씌운 면이 채 마르기 전에 어떤 이가 뾰족한 걸로 긁어낸 것이다. 아니, 사실 'SJ' 아니면, 친구의 장난질일 테니, 익명의 행위자라 할 것까지는 없다. 그래도 행위자를 단정하기엔 증거가 부족하다. 관계없는 제3의 인물이 마음속 상대를 기입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새겨진 이름은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어릴 적 일이다. 한 친구가 나 몰래 신축 건물 벽에 'KS는 바보'라는 문구를 새겨 넣은 것이다. 스스로를 비하할 일은 없으니, 나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 짓을 한 어떤 이를 찾는 일은 어려웠다. 정말 바보처럼 '나 빼고 다 나와!' 하는 짓은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모퉁이처럼, 이번엔 "SJ 다 나와!"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정이 어떻든, 이름이 새겨진 당사자는 그 자취가 껄끄럽거나 후회스러울 것이다. 우선 KS는 건물이 남아있는 한, 그 세월만큼 내내 놀림감으로 남는다. 그럼 'SJ'인들 온전할까?
설혹 자발적으로 이름을 새겼더라도 줄곧 통행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내뱉는 가래침으로 이름을 더럽히는 일, 오명도 견뎌내야 한다. 혹 'SJ'가 외톨이라면, 이 모든 걸 감수할 수는 있겠다. 어떤 이도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여기에 나란히, 'KS'는 바보를 벗어나, 유명인일 수도 있다. 이도저도 아니면, 둘 다 그저 평범하거나, 오히려 존재가 흐린 이 일 수도 있다. 이처럼 가능성은 다양하다. 그러나 시멘트에 새겨진 이름은 단순한 낙서일 뿐 그런 전망과 특별한 관계는 없다.

실상 원시인인들 이름이 없었겠는가?
그들은 사물을 이르는 상형문자로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고래, 사냥하는 사람, 쫓기는 사슴...
단지, '옆 동굴 b 씨, 앞 귀틀 집 h 씨'같은 자기의식이 옅을 뿐이다. 그래도 키 큰 라스코 동굴씨', '뚱뚱한 점말동굴씨' 같은 호칭은 상상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럼, 문자를 쓰던 시절은 어떠했는가?
영원을 상징하는 바위에는, 세월의 이끼에 덮인 인명이 새겨져 있다. 적어도 당대 위업이나, 후세에 남길 호기로움으로 말이다. 그것이 오명이든 자랑스러움의 가능성이든, 신경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견고한 암석을 닮아, 오래도록 기억되고 불려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石亭(석정) 모지리'같은 비하가 없어도 냉소가 뒤섞인다. 이름을 새기는 일에는 석공의 노동이 힘겹게 전개된다. 그 한편에서는 유세가의 유희가 펼쳐졌을 걸 상상해 보라. 아마 그 작업은 존경보다는, 비아냥이 한껏 가미되었을 것이다.

'이르다'는 무엇을 가리키는 일이다. '이름'이라는 파생어가 명사인 것은, 항구성을 갈구하는 것이다. 동사처럼 움직여 흩어지고 변모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다. 만일 '산이다', '이름이다'가 동사였으면 어떠했을까?
산이 꿈틀거려 수시로 바뀌고, 사람도 매번 변해 일관성이 약해 보인다. 물론 사람은 다르다. 고유명사라도 자아는 변해 가기 때문이다. 여하튼 동굴 벽화에 새겨진 사냥감은, 그것의 안정적 확보 염원이라 할 수 있다. 바위에 새긴 이름은 굳은 성정을 은유하는 것이다. 시멘트 면에 새긴 이름도, 영구히 기억될 인물이라는 바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작용'과는 다르게, 세상의 온갖 조롱도 감당해야 한다.

익명을 벗어나 이름을 얻는 것은, 역설적으로 무명일 때이다. 이미 드러난 존재에게는 새 기호가 생기지 않는다. 심해 생물, 발견된 적 없는 무명만이 이름을 얻는다. 그러면 기존의 명명은 순식간에 자리를 잃고 물러난다. '슈빌, 이른바 살아있는 공룡 넓적부리 황새'도, 그보다 선 기원 앞에서는 보통명사가 되어 버린다. 시선을 잃어 실명이고, 이름을 상실해 실명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름을 남기고자 집착한다.
어떤 수식어도 개의치 않는 듯 말이다.
'희대의 흉악범 JDS', '세계적 물리학자 LHS'...
그러나 분명 평가는 다르다.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남는 이름과 자신이 흔적을 남기고자 애썼던 이름.
그들의 단순 공통점은, 돌에 새긴 후에야 화석처럼 기억되는 것이다. 하지만 비문처럼 질겨진 이름을 갖는 일은 흔치 않다. 그래서 광물을 뚫을 만한 압도적 경험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갖길 원하는가?
영구히 지워지지 않는 이름일 것이다. 육신은 부패해 스러져도, '나'라는 기호를 남기려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상징은 별 의미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이름과 죽음 사이에는 특별한 상관관계가 없다.
"Smith, 여기 영원히 잠들다"라는 비문으로는, 무덤에 묻힌 자가 대장장이임을 단정할 수는 없다. 단지 그의 조상이 대장간 종사자였음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Bill Gates'라고 한들, 세계 최고 갑부 대신, '어느 문지기 출신이라는 추측 밖에 더하겠는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라는 시가 있다.
그럼 꽃이라 불리기 전에는 무엇이었는가?
돌이라 한들, 책상이라 그래도 무방하다. '책상'이 '꽃'으로 바뀌어 불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꽃은 무어라 불리던, '꽃 자체'로 존재했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꽃이 된 건 아니다. 오히려 이름을 감추고 있던 것에서 비로소 꽃으로 드러났다. 물론 그 꽃은 치열한 고뇌를 통과한 결과에 의해 얻어진 이름이다. 그러니 아무렇게나, 그저 운이 좋아 주어진 이름은 아니다. 그럼에도 어느 한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몸부림은 공허하다. 오히려 그것이 진정한 꽃이 되려면 꽃을 벗어나고자 하는 뒤틀림이어야 할 것이다. 꽃이라 불리기 전의 '꽃 자체'가 그의 제대로 된 이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어떤 이름이고자 하는가?
어쩌면 이름을 알리지 않으려 부리는 호기에서 진정한 이름을 얻는 것은 아닐까?
"道(도)는 도라고 하는 순간, 이미 도가 아니다." 하는 말이 있다. 실로 그보다 더 단단한 단언이 어디 있기나 할까?
도는 이름이라는 상징으로 내려앉으면 그 실재를 상실하니 말이다. 라캉에서 읽듯이, 우리가 갖는 이름은 상징세계의 겉모습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염원하는 것은 이름 지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처럼 이름은, 이름이 없음으로써 진정한 이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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