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도착하거든 내용물만 꺼내 냉동실에 둬."
예정보다 늦은 배달에 조바심치던 아내가 운동 나가면서 하는 부탁이다. 상하기 쉬운 냉동식품이라 염려스럽던 것이다. 다행히 아내가 집을 떠나자 말자, 물품이 도착했다. 냉동용 얼음주머니 3개도 보인다. '내용물만'을 잊고 몽땅 끄집어낸다. 한꺼번에 옮기느라 엉거주춤하다가 얼음 봉지가 팔목에 닿았다. 접촉한 살갗이 따끔거린다. 차가운 얼음 때문이겠지.
그런데 웬걸, 냉기에 닿은 부위가 빨갛게 부어오른다. 아차, 그냥 얼음이 아니라 드라이아이스 같은 모양이다.
수증기를 발산하는 게 아니니, '드라이'는 아니다만...
물로 식히고 서둘러 연고를 발랐다. 아내에겐 그런 일이 있었음을 말하지 않으리라. '내용물만'을 건성으로 들은 역정이 따를 게 뻔하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그건 겔 아이스, 냉매용 화학 아이스 따위로 만든단다. 공히 피부에 닿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도 알려준다. 역시 그냥 물을 얼린 게 아니었다.
화학제품이 들끓는 세상에 물로 얼린 얼음만 차갑겠는가?
색깔, 성분이 달라도 냉동 역할을 하는 냉매이다. 그런 걸 얼린 물같이 여겼을 뿐이다.
경험이 쌓이면 몰라도, 확실히 미경험, 미성숙한 존재는 판단력이 떨어진다.
겨우 기어 다니는 아이라면, 곧장 입을 갖다 댈 것이다. 그전에 손가락이 쓰려 먼저 울음을 터뜨리면 그나마 낫겠지만.
생물은 물론, 사물에는 신호가 있다. 돌은 딱딱해, 걷어차면 통증을 전달한다. 나무나 풀은 고약한 냄새를 발산한다. 함부로 걷어차거나 베지 말라는 발신이다.
숲 속에 들어가 보면 각종 새소리가 마음을 맑게 한다. 모든 것을 잊고 깃털처럼 가볍게 한다. 한참을 그러다가도, 지속되는 소리엔 머리가 쭈뼜서게 만든다.
"야, 너희들 해칠 생각 없으니 그만 울어대라!"
이제 노랫소리는, 달리 경고음으로 들린다.
날카로움, 악취, 가려움, 힘든 호흡...
사물은 이처럼 신호를 보낸다.
방어 능력과 그 반대편의 공격 신호가 맞선다. 공격성은 체구나 소지한 도구, 사회적 지위 등의 과시적 신호로 나타낸다.
수신자의 것이 상대적으로 약하면, 그것은 공격 신호에 묻힐 것이다. 때로는 공격 능력이 우세해도, 평판이란 요소는 그 힘을 약화시킨다.
이처럼 신호는, 내외부를 달리할 수 있다.
누구에게도 강력한 신호를 보내는 격투기 선수가, 거미 한 마리에는 기겁한다. 전쟁터에서 수도 없이 적을 베던 무사가, 연약한 여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런 강한 신호가 나약함의 표현일 수도 있다. 세상이 그렇듯, 여기에서도 복화술 같은 이중성은 작용한다.
"안 돼요~. 돼요~~ 돼요~~ 돼요~~ 오!"
동굴에 부딪히는 메아리의 왜곡이다. 그녀는 분명 거부하는 몸짓을 한다.
하지만 참으로 곡해일까?
동굴은 이미 그녀의 마음을 간파한 듯, 허용의 신호로 바꾸고 있다. 또는, 불허의 제스처를 동굴이 "돼요~~ 오"로 뒤집은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녀는 이미 허용할 마음이되, 부정의 형식만 빌린 것뿐일까?
사실 어떤 것도 오인일 수 있다. 소음인지 신호인지는 당사자의 마음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과거든 현재든, 그리고 미래에도 신호는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지구에서만 빚어지는 것도, 보이는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알 수 있는 것만 신호인 것도 아니다. 여전히 해독 불가능한 고대 문자, 우주에서 도달하는 전파, 해저에 깔린 전설 등도 모두 신호이다.
그런 헤아릴 수 없는 신호로도 부족한 것일까?
모르긴 해도, 가상공간에는 이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신호로 넘친다. 그리고도 계속 소통 장치를 통한 신호는 수수된다. 그런데 오늘의 신호는 점점 수신인을 잃고 소음이 된다. 수신처는 무한하지만 받는 이는 없다. 도달하지 않는 우편물 같다.
"어젯 저녁 8시경, 안타깝게도 세 모녀는 극단적 선택을 했습니다. 수년간 생활고에 시달린 결과로 보입니다. 유서에는 석 달 치 월세를 남긴다는 것과, 마지막까지 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신호를 보내지 않았을까?
애들이 다니던 학교에서도, 어머니의 조그만 삶터에서도. 어쩌면 내키지 않아, 침묵의 신호만 보냈을 수도 있다. '침묵' 자체는 어떤 신호도 아닐 수 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어떤 호소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최후의 선택으로 이어진 가장 강한 신호가 되었다.
우리는 신호에 둔감하다. 신호음 자체의 약함보다는, 질식하는 소음에 감지능력이 둔화되기 때문이다. 받고도 열람하지 않는 신호는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별 효과가 없을 듯함에도, 발신 강도는 더 강해진다.
하지만 신호가 많을수록, 요란할수록 주목률은 더욱 떨어진다. 무관심의 방어력도 그 이상으로 강력해지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그토록 어지러운 정보 무더기에서 어떻게 신호와 소음을 구별할까?
보내지 않아도 느끼는 신호,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신호?
그런 교신은 얼마나 될까?
장치를 통해 대량 반복되는 신호는, 몇%의 확률이듯 사실상 부존재이기 쉽다. 마음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산처럼 쌓인 무감각에 덮여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마음의 신호는 오히려 많지 않다. 적으며, 눈치채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제일 높고 가장 강한 전파를 발사한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깨우는 신호가 필요한 게 아닐까?
"아이고 나 죽네!"
결국 나는 아내에게 얼음 팩 사건을 말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죽는다고 엄살을 부렸다. 핀잔을 덮으려는 농간에서 말이다. 아내는 예의 잔소리를 거두지는 않았다. 대신 환부를 살펴보고는, 다시 잘 듣는 연고를 발라 주었다. 침묵이 가장 강할 수도 있지만, 이럴 땐 도움의 발신음이 더 나으리라. 단, 소음은
아니길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