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에서 빈곤 포르노 : 대중에게 빈곤을 부각해 모금 운동 효과 등을 보는 사진과 영상물을 빗댄 말 ['19.1.9, 머니 투데이]' 얼마 전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에도 복지 포르노니 하는 말들이 서슴없이 표현되는 것을 보았다. 온몸을 다 까발리고 은밀한 내용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죄다 보여 주니, 신비감이나 사랑의 고결함까지 지하 수준으로 패대기치는 것 같다. 성적 유희물을 가감 없이, 더 나아가 과장되게 드러내는 것이, 주장의 일면을 방어할 수 있을까? 훔쳐보고자 하는 욕구를 보이는 욕망으로 전환함으로써, 성범죄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하지만 그것이 부과하는 부작용이 더 클 것이라 보인다. 사람에겐 따라 하기가 그다음 단계이니, 이 과장 된 제스처에서는, 약물이나 온갖 괴팍한 작태가 벌어질 것이다. 그같이 빈곤 포르노라는 것도, 생각과 같이 가난을 물리치거나, 완화하는 일에 스펙터클한 전환을 가져오지는 못할 것이다. 수전 손택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보여 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 된다.
2. 참상은 공모를 필요로 한다
뉴스 전문 채널을 보다가 자체 방송 시간이 되면, 아프리카 주민들의 생활상, 우크라이나나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참상 등이 광고로 나온다. "아내는 그 장면이 보기 힘들어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려버린다. "제대로 돕지도 못할 건 데, 저런 걸 누가 보라고?" 한 편의 탄식에서는 다른 안도가 뒤따른다. "휴, 우리가 저런 나라에 태어났더라면?" 광고는 그 자체만으로도 효과를 거두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들의 참혹상을 인식하고 있으니, 이제 제대로 된 실천이 따라야 한다고 우리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저 가진 자를 질시할 줄만 알았지, 정작 '가진 자'가 되어 있는 나 자신은 그들을 외면하는 것이다. 포르노는 굳이 다 벗겨내지 않아도, 자체로 그 역할을 한다. 그런데 세상은 굳이 여러 사회현상을 광장에 효수한다. 적나라함을 보임으로써 권력을 전시하는 것이다. 최근엔 예전보다는 뉴스 기사가 한층 노골적인 것이 되었다. 사회악을 저지르는 범행이 보다 잔학해진 이면에, 뉴스는 보다 자극적인 이미지에 의존한다.
3. 한여름에 도포자락 날리기
서로 간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보다 신경을 자극하고 주목률을 높이기 위한 벙법들이 동원되는 것이다. 어떤 매체든, 그런 내용을 전달받는 영상 앞에서는, 분노한 시청자의 욕설과 비난 자체가 다른 포르노로 맞선다. 노골적이고 적개심을 크게 불러일으킬수록, 권력은 제 몫을 다할 영웅으로 나타날 것이다. 분노 게이지가 고장 나, 지붕을 뚫어야만 성공적인 것이다. 이런 대담한 표출이 일상화될수록 사람들의 반성도 한층 높아질 것 같지는 않다. 아내가 전쟁이나 기근의 비참함을 보기 힘들어하듯이, 그것은 살짝만 보여 주어도 충분할 것이다. 매체 수단의 많고 적음, 사회 복잡화의 아노미 현상 등의 차이, 사회 성격의 폐쇄성 따위에서 구별은 되겠지만, 더 보여줄수록 더 어지러워지는 것이 아닌가? 어느 정도가 그것을 말해준다는 기준은 없지만, 적어도 볼 것이 많을수록 거기에 사람들을 묶어 두기보다는, 회면을 뚫고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옷을 차려입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