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흐름을 이어 보면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진다. 하지만 시간은 없다는 것처럼, 그것은 공간에서나 관념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이가 들어 생명이 다하는 것은, 직선적 연장선상에서는 구분되는 것이지만, 원처럼 둥글게 돌아갈 때는 출발과 종점이 마주친다. 씨앗은 그 속에 잠재력을 안고서 땅에 떨어지지만, 마치 생명이 없는 것에서 새로운 생명이 배태되는 형상이다. 아이는 스스로 일어서기 전에는 땅바닥을 기어 다닌다. 노인은 기력이 없을 때에는 몸이 자꾸 아래로 굽혀진다. 그 중간에 사람들은 걸어 다니면서 활동이란 것을 영위한다. 그것을 직선상에 펼치면 각각의 위치로 환원되겠지만, 일직선상으로 표시하는 것은 임의적이다. 시간이 연장으로 펼쳐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점 하나에 실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을 무수하게 이어서 선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그런데 요즘은 시간이 관념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계절이 매년 한 달은 당겨지는 것처럼, 벌써 한여름이 시작된 느낌이다.
2. 시간이 없다기보다는, 두 계절이 엉켜 붙는 것 같다.
봄은 여름에 말라붙고, 가을은 겨울에 뒤섞이는 것 같다. 비단 이상 기후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세상은 서로 말라 붙는 것이다. 직선상의 변화가 아니라 순환적인 시간이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순환조차도 없어지고 고정되는 느낌이다. 그러면 우리 시대에는 시간이 어떤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정지된 것으로 흐르지 않는다. 세상도 움직임을 멈춘다.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에서 각종 현상들이 비롯될 텐 데, 이젠 그것으로 세계를 구성하지 못한다. 그러니 어제 보던 것이 오늘 별 다른 감각을 제공하지 못한다. 점에서 튀어나오는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던 것이, 이제는 지구만 한 큰 덩어리가 변화해야 겨우 그것을 느낄 지경이다. 겹쳐 말하기는 이미 타당하다. "봄이 왜 이래"라는 말은, "이미 여름이네!"라는 말과 동격이다. "가을이 없어졌네!"라는 말은 겨울뿐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이제 시간은 직선적이지도 않지만, 순환적이지도 않다. 굳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순서가 역류하거나 뒤죽박죽으로 정렬될 뿐이다
3. 계절이 구별불능이라면, 시간도 선후를 나눌 수는 없다.
산업시대의 시간 흐름도 이제는 감지하기 힘들다. 둥근 원운동을 하듯, 아침 7시에 일어나 직장으로 향하고 12시에 점심을, 오후 6시면 퇴근을 하던 기본 패턴은 그 모습을 달리한다. 숫자로 표시되는 시간은 더욱 어디에서 어디로 옮겨왔는지를 알기 힘들게 한다. 언제나 고정점처럼 보이는 숫자판에 정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이런 모습을 띠니, 우리 삶도 고정점이다. 아무 변화 없는 삶에 하루를 맡기다 보니, 뭐가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그저 고착된 삶에 대한 가벼운 저항뿐, 그나마 자신의 삶에 대한 가벼운 반성이라도 있으면 다행인 편이다. 부당한 압박에 신음하면서도, 대안이 없는 뭉툭한 삶인 것이다. 자연히 어제가 오늘이고 내일도 별 다른 게 없다. 과거의 시간이 오늘에, 또 내일에 엉켜 붙는다. 구분 없는 시간, 정지해 흐르지 않는 시간이 현대적 삶이다. 여름 같은 봄, 겨울 같은 가을이 더욱 멈춰버린 존재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자판 위에 째깍거리며 사나운 팔을 휘젓던 시간도, 이제는 제자리에서 쳐다볼 뿐이다. 6이 쓰여 있던 11이 표시되던, 그것은 별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은 의미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갓이다. 과거는 지층에 깔린 것이 아니라 박물관에서 전시되며, 미래는 이미지로 이미 곁에 있는 것이다. 구분 없는 시간, 정지된 삶이 우리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