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신체형은 잔인할수록 사법의 영광을 만드는 요소이다. 죄인이 비명을 지르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국가권력의 수치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에 대한 장엄한 과시인 것이다. 광장에서의 국가 권력은 형집행에 의해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감시와 처벌, 미셸 푸코] 오늘날의 광장은 디지털 공간으로 옮겨갔다. 공권이 전시되는 대신, 지식 권력이 자리를 장악한다. 권위와 신뢰를 잃은 공권력을 비켜, 사적 권력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공권력이라고 하면, 기껏 이 디지털 광장이 사적 권력의 과잉으로 엉뚱한 피해자를 만들 때에나 비로소 겸연쩍게 나서는 것이다. 진의야 다른 데 있겠지만, 그 사태에 대해서는 공적 광장이 전시하는 것과 같이 사적 광장도 과시를 거친다. 공적인 것이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사적인 것은 국권에 위임된 사적 보복 감정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국가권력이 더 이상 침혹한 신체형을 가할 필요 없이 교화와 훈육으로 신체를 새롭게 조직하는 동안, 가혹한 야만적 폭력을 통한 'tit for tat, tat for tit',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등가 감정을 보충하는 것이다.
2. 디지털 광장은 다시금 이들을 공개된 처형장으로 끌고 나온다.
개인의 성장 과정, 직업, 가족관계 등 디지털 법정에 선 개인의 신상은 물론, 그와 관련된 일체를 폭로한다. 숨을 곳이 없다. 그것이 사지를 도려내는 물리력 대신에, 그 이상의 심리적 고통을 가하는 것이다. 누가 그런 정당성을 부여하는가? 폭력은 어떤 이름으로도 금지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사람들은 환호한다. 더 큰 힘을 가해, 아예 이 참에는 장례를 치르도록 응원한다. 여기에는 법정 최고형이란 한계도 사라진다. 결국 폭력이란, 절제되거나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공적 역할이 이 모든 보복 감정마저 충족시키고자 다시 범죄자들을 물리적 광장에 세울 수 있는 건 아니다. 기소와 처벌, 완전한 사회적 퇴장이 사적권력에 맡겨지는 순간, 이제는 법집행자를 자신으로 바꾸는 것이다. 타인에게서의 판단이 자신으로 옮긴다. 내면의 타자가 걸어 나와서 자신의 반성으로 이어지는 것이야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것은 반성되지 않은 상태의 자신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다.
3. 여전히 속죄에 대한 것은 타인에 맡겨져 있다. 자신 속의 타인을 겉으로 드러내어 법정에 세우는 것은 외형상 같더라도, 내용에서는 다르다. 어떤 가닥으로 진행될 것인가? 최근엔 20년 전 성폭행 사건 가해자 무리를 디지털 법정으로 재소환하는 일로 시끄럽다. 반사회적 행위자에 대한 사회적 면제를 소급해 재조명하는 것이겠지만, 공적 승인처럼 보이는 이 사건 당사자가 떳떳하게 잘 살고 있다는 것에 사회는 새삼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만하다. 그런데 그때 그들을 광장에 내세울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20년 전이라도 지식이 부족했던 건 아니며, 사회적 여론이 적대적인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법적 판단은 동일할 것이다. 외국 어느 경우처럼, 사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는 나이까지 처벌을 유보하는 경우에는 사정이 좀 달랐을까? 그것을 집행하는 것이 마치 지금의 사태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리적으로는 면소 처분을 받던 것이 디지털 방식으로는 단지 유예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것이다. 물리적 법이 나서는 것은 이런 엉뚱한 국면일 것이다. 처분을 마친 사법 권력은 더 이상 손댈 수가 없다. 사적 권력만이 저간의 위력을 보일 뿐이다. 그 모든 것이 행위자를 향해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면, 완전하지 못했던 행위자는 내면의 타자를 끌어내야 한다. 바깥에 선 자신과 대면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과한 처벌에 직면해야 한다. 현실은 묻혀 있었다. 하지만 가상공간은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비호하는 차원은 결코 아니며, 공적 기능의 회복이 절실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다만, 권력의 전시 차원이 아니라 현실적 공간으로서의 회복으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