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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무게

by justit


1. 부정성이 긍정성으로

100점 짜리가 있을까?

허용할 수 있는 측정 단위 한계가 그럴 것 같으면 가능하기도 하다. 대입 시험에서 출제자에 대한 결례를(?) 저지르는 수능 만점자도 출현한다. 상한선이 그것을 초과하기로 하면, 그것도 넘을 기세이다. 재산을 기준으로 하면, 얼마를 가져야 그런 평가를 받을까?

사회적 지위, 명성 따위는?

그렇게 삶을 영위한 사람들은 사후에 흔적을 남기고 갔으니, 평가가 '0'으로 백지화 되는 건 아니다. 다만, 물리적으로만 쓸모없는 물질로 변해 정지 상태가 될 뿐이다. 절대적 기준이라면 이런 것 뿐이고, 죄다 상대 비교에서 비롯된다. 많이 가진 사람은 그보다 더 소유한 사람에 비해서는 행복해 보이지 않고, 회사라면 이사쯤 이나 되어야 그럴 것 같다. 이런 것 마저 없을 때는, 그래도 밖에 나가면 알아 봐 주는 타인이 얼마 간은 있어야 인정받는 존재일 것 같다. 눈을 아래로 내리면 불행이 행복으로 바뀐다고 하기도 한다. 평생 장애아나 난치병 자녀를 돌봐야 하는 부모를 보면, '우리 애들은 안 그러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위안을 얻는다. 저명한 인물들도 한 순간의 잘못으로 불행하게 생각하는 자신보다 훨씬 나락으로 내려 앉는다.

2. 중력이 역전하는 곳

행복은 어찌 보면 부족한 것을 채움으로써 비롯되기 보다는, 일종의 뺄셈이다. 판단 기준을 타자와의 비교에서 가져오니 늘 부족한 것이고, 이를 부정성인 불행이란 이름으로 부른다.

"아빠 힘들지? 내가 걸어서 갈 게!"

땀을 뻘뻘 흘리며 어린 아이를 안고 가는 이 사람은, 힘들지 않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아이가 던져주는 이 기특함은, 신체적 힘듦은 물론이고 마음에서는 깃털처럼 한 없이 가벼운 무게이다. 가끔씩 삶이 짓누르다가도, 그보다 더 큰 질량에서도 충분히 들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항상 저울질이 좌우로 흔들릴 때에도, 이 떄 만큼은 어느 곳에 놓아도 균형을 이룬다. 돈을 주고 남에게 힘든 일을 시키는 일에서는 요동치는 중심을 인위적으로 조절해야 하지만, 마음의 저울은 언제나 이쪽 끝의 무게 100t과 맞서 균형을 이룬다. 가족이라는 무게는 그런 것이다. 구성원 각자의 이해를 버리고, 천근 만근으로 무너지는 일상을 돌이키는 것이다.

3. 모든 것이 가능한 공간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눈이 시린 존재가 가족일 것이다. 바깥에서는 타인과의 무수한 연출이 진행되는 동안, 가족내에서는 다큐가 이뤄진다. 아니, 제대로 말하자면 과잉된 사극이 방영될 것이다. 아빠는 처음부터 Tom Cruise이고 딸은 언제나 다이애나 실버스,, 엄마는 니콜 키드먼, 아들은 티모시 살라메를 벗어 나 본 적이 없다. 직장 생활에서 중간 간부로 마감했지만, 나는 언제나 중역이었고, 별 쓸 데 없는 곳에 눈길을 줘도 나는 늦게 출발한 노벨 문학상 후보이다. 사람들이 부딪히며 사는 공간에서는 무게가 쪼그라 들지만, 이 사실적 공간에서는 엄청난 중력이 생긴다. 그래서 삶은 균형을 회복하고도 남는다. 가족은 그러한 존재이다. 불가능이 가능이 되고, 불안이 위로가 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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